민사 · 2026년 10월 16일 · 변호사 김영빈
공상처리 — 위험한 것은 기록 없는 공상입니다
공상처리는 산재보험에 알리지 않고 회사가 치료비와 보상을 직접 해결하는 사적인 합의이고, 회사 돈으로 하는 공상에 응했다고 근로자가 처벌받는 일은 없습니다. 받아도 되는 공상의 조건, 치료가 길어지고 장해가 남을 때 공상이 무너지는 순서, 다친 경위를 바꿔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으면 받은 사람도 처벌받는 이유를 정리합니다. 서명 전에 회사에 보내는 문자 한 통, 진료실에서 하는 한 문장, 합의서 사진과 계좌를 남겨 두면 몇 달 뒤에도 산재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치료비는 회사가 다 댄다는 제안,
서명 전에 남길 3줄

다친 다음 날, 팀장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치료비는 회사가 다 댈게. 산재는 하지 말자." 현장에서 공상, 공상처리라고 부르는 제안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분들의 걱정은 2가지로 모입니다. 받아도 되는가. 받고 나면 나중에 불리해지지 않는가.
회사 돈으로 치료받는 공상에 응했다고 처벌받는 일은 없습니다. 받는 쪽이 나은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위험한 것은
공상 그 자체가 아니라,
아무 기록 없이 하는
공상입니다.
서명 전에 남길 것은 3줄이면 됩니다.
받아도 되는 공상이 있습니다
공상처리는 법령 어디에도 없는 말입니다. 산재보험에 알리지 않고 회사가 치료비와 보상을 직접 해결하는 사적인 합의, 그게 전부입니다. 정해진 양식도, 정해진 금액도, 지켜 주는 기관도 없습니다.
회사가 이 방식을 원하는 데에는 계산이 있습니다. 3일 이상 쉬어야 하는 재해가 나면 회사는 1개월 안에 산업재해조사표를 관할 지방고용노동관서에 내야 하고, 산재로 처리되어 공단이 급여를 많이 지급하면 회사의 산재보험료가 오를 수 있습니다. 조사표를 내지 않거나 산재를 숨기면 과태료와 형사처벌을 받는 쪽도 회사입니다. 산재를 신청하지 않았다고 근로자를 처벌하는 조항은 없습니다.
그러니 따질 것은 내 몸과 내 돈입니다. 3일 안에 나을 부상이라면 산재에서는 치료비도 휴업급여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범위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회사가 치료비를 부담하는 몫이라, 회사 돈으로 치료받는 것이 법이 정한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보다 오래 쉬어야 한다면 비교를 해 봐야 합니다. 산재 휴업급여는 평균임금의 70%입니다(소득이 낮으면 90%까지). 회사가 치료비 전액에 쉬는 날의 임금까지 깎지 않고 쳐 준다면, 계산상 공상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상이 정말 며칠짜리인지는 오늘 알 수 없습니다. 허리와 무릎과 머리는 몇 달 뒤에야 제대로 아프기 시작하는 경우가 있고, 골절은 뼈가 붙은 뒤에 후유증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가벼워 보이는 사고가 정말 가벼웠는지는 시간이 지나야 압니다.
그래서 공상을 받을지 말지는 "가벼운 사고인가"로 정할 일이 아닙니다.
"나중에 마음을 바꿀
수 있게 해 두었는가"로
정할 일입니다.
서명 전에 남길 3줄
회사에 문자 한 통. "오늘 오전 ○○ 작업 중에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 다녀오겠습니다." 일하다 다쳤다는 사실이 날짜와 함께 남습니다. 답장이 없어도 보낸 기록으로 충분합니다.
진료실에서 한 문장. "일하다 다쳤습니다." 치료비를 누가 내든, 처음 진료받을 때 기록에 적히는 경위만은 사실대로 남기셔야 합니다. 이 한 줄을 나중에 대신해 줄 서류는 없습니다.
합의서 사진과 계좌. 합의서는 사진을 찍어 두시고, 돈은 되도록 계좌로 받으시면 됩니다. 어떤 명목으로 얼마를 받았는지가 서류로 확인됩니다.
합의서에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어도 겁내실 것 없습니다. 산재보험 급여는 근로복지공단이 근로자에게 주는 것이라, 회사와 쓴 합의서가 공단에 대한 청구를 막는 조항은 법에 없습니다. 다만 회사에서 이미 받은 돈 가운데 치료비나 쉬는 날의 임금처럼 산재 급여와 같은 몫은 공단이 빼고 줍니다. 그 셈의 기준이 합의서이니, 사진이 필요합니다.

3줄을 남기는 데 5분이 걸리지 않습니다.
공상이 무너지는 순서
먼저 치료가 길어집니다. 합의금은 정해진 돈이고 산재 요양은 나을 때까지 이어지는 제도라서, 치료가 예상을 넘는 순간 공상 쪽 돈이 먼저 바닥납니다. 회사의 호의도 보통 여기까지입니다.
그다음 장해가 남습니다. 장해급여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청구해야 나옵니다. 합의서에 장해 보상이 적혀 있지 않다면, 공상만으로는 치료가 끝난 뒤의 장해가 그대로 다친 사람의 몫입니다.
그제야 산재를 신청하려고 보면 사고의 흔적이 없습니다. 회사에 낸 보고가 없고, 진료기록에는 다른 경위가 적혀 있고, CCTV는 지워졌고, 옆에 있던 동료는 회사 눈치를 봅니다. 산재는 일하다 다쳤다는 사실을 다친 사람 쪽이 증명해야 하는 제도입니다. 기록 없는 공상은 그 증명에 쓸 재료를 처음부터 만들지 않습니다.
3줄이 막는 것은 이 마지막 단계입니다.

"집에서 다쳤다고 해 주세요"
공상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치료비를 건강보험으로 처리하면서, 다친 경위를 바꿔 말하는 것입니다.
치료비 전액을 회사 돈으로 내자니 부담이 크고, 건강보험을 끼우자니 "일하다 다쳤다"고 적힌 진료기록이 걸리니, 경위를 바꿔 달라는 부탁이 나옵니다. 그런데 일하다 다친 부상은 산재나 회사의 보상이 있는 한 건강보험이 내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거짓 경위로 건강보험 치료를 받은 것이 드러나면, 건강보험공단은 그 치료비를 받은 사람에게서 다시 걷습니다. 회사가 거짓 증명을 했다면 회사도 함께 냅니다.
회사 돈으로 하는 공상과 달리, 이 경우에는 받은 사람도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더 아픈 것은 그다음입니다. 몇 달 뒤 산재를 신청하거나 소송을 하게 되었을 때, "집에서 넘어졌다"고 적힌 자기 진료기록이 가장 먼저 반대 증거가 됩니다. 스스로 만든 반대 증거만큼 뒤집기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건강보험을 쓰는 길이 아예 막힌 것은 아닙니다. 산재를 신청해 두면 근로복지공단이 결정하기 전까지는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돈을
누가 내느냐가 아니라,
기록을 거짓으로
만드느냐입니다.
몇 달 뒤 마음이 바뀌면
서명을 했어도, 몇 달이 지났어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요양급여와 휴업급여는 3년, 장해급여는 5년 안에 근로복지공단에 청구하면 됩니다. 산재를 신청했다는 이유로 회사가 해고하거나 불이익을 주면 처벌받는 쪽은 회사입니다(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 회사는 근로자가 요구하면 산재 신청에 필요한 증명을 해 줘야 합니다.
다만 2가지가 따라옵니다. 하나는 증명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하다 다쳤다는 것을 보여 줄 재료가 줄어듭니다. 3줄이 있다면 절반은 된 것이고, 없더라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동료의 기억, 결근이 찍힌 급여명세, 회사가 치료비를 보내 준 이체 기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회사가 치료비를 댔다는 사실 자체가 사고를 방증합니다.
다른 하나는 정산입니다. 회사에서 받은 돈이 치료비로 적혔는지, 쉬는 날의 임금으로 적혔는지, 위로금으로 적혔는지에 따라 공단이 빼는 몫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합의서의 문구 하나가 셈을 바꿉니다.
공상처리를 대리해 달라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시는 분은 없습니다. 애초에 변호사의 일이 아닙니다.
변호사가 이 말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그다음,
공상으로 덮어 둔 사고가
몇 달 뒤 산재 신청이 되고
소송이 되어
돌아왔을 때입니다.
저는 공상이 깔린 채로 시작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해 봤습니다. 흩어진 기록을 다시 모으고, 받은 돈이 치료비인지 임금인지 위로금인지 하나씩 가려내야 했습니다. 다친 분이 혼자 해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 다툼의 승패는 법정의 변론이 아니라, 사고 당일에 남았거나 남지 않은 문자 한 통, 진료기록 한 줄에 걸려 있었습니다.
공상은 죄가 아닙니다. 기록 없는 공상이 위험할 뿐입니다. 서명은 하시더라도, 3줄은 남기고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