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 · 2026년 8월 9일 · 변호사 김영빈
산재 장해등급 - 법원은 등급을 쓰지 않습니다
공단의 장해등급과 법원의 노동능력상실률은 같은 '장해'를 다르게 재는 두 제도입니다. 등급이 나와도 법원은 신체감정으로 처음부터 다시 재고, 상실률 몇 퍼센트가 일실수입 수천만 원을 만들거나 지웁니다. 감정이 소송의 크기를 정한 산재 사건과 형의 길이를 정한 형사 사건을 함께 겪은 변호사가, 감정대에 오르기 전에 준비할 것을 정리했습니다.
등급은 공단에서만 통하는 말이고, 법원은 감정이 전부입니다.
치료가 끝나면 근로복지공단은 몸에 남은 장해를 등급으로 매깁니다. 1급부터 14급까지, 등급이 나오면 장해급여가 나옵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여기서 같은 계산을 합니다. 등급이 이만큼 나왔으니,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 그만큼 받겠구나. 혹은 반대로 — 등급이 안 나왔으니 소송을 해도 소용없겠구나.
둘 다 틀린 계산입니다. 법원은 공단의 등급을 가져다 쓰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잽니다. 그 절차의 이름이 신체감정입니다. 저는 그 감정이 소송의 크기를 통째로 바꾸는 것을 물어주는 쪽 대리인의 자리에서 지켜봤고, 같은 이름의 제도가 사람의 형량을 재는 법정에도 서 봤습니다.
열네 개의 등급
산재 장해등급은 치료가 끝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치료가 끝났다는 말은 다 나았다는 뜻이 아니라, 더 치료해도 좋아질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는 뜻입니다. 그 시점에 남아 있는 장해를 주치의의 장해진단서와 공단의 심사를 거쳐 등급을 결정합니다.
1급에서 3급까지는 연금으로만, 4급에서 7급까지는 연금과 일시금 중에 골라서, 8급에서 14급까지는 일시금으로 받습니다. 손가락 마디 하나, 청력 몇 데시벨, 척추의 운동 범위 — 등급표는 몸의 부위와 기능마다 칸이 정해져 있는 목록입니다. 공단의 등급 판정은 빠르고 표준화되어 있습니다. 전국 어디서 다쳤든 같은 기준으로 판정하고, 회사의 잘못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등급표에는 앞선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한계가 그대로 있습니다. 표에 없는 것은 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친 분 입장에서 정말 큰 돈이 걸린 질문 — 이 몸으로 정년까지 일했다면 벌었을 돈은 누가 계산해 주는가 — 는 법원으로 넘어갑니다.
법원의 감정 - 노동능력상실률
회사나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면, 법원은 공단 등급을 참고자료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법원이 알고 싶은 것은 등급이 아니라 노동능력상실률 — 이 사람이 일할 능력을 몇 퍼센트 잃었는가입니다. 그 숫자를 얻기 위해 법원은 대학병원급 감정의에게 신체감정을 맡깁니다. 감정의는 의무기록과 영상, 진찰 결과를 놓고 의학적 기준표에 직업과 나이까지 반영해 백분율 하나를 내놓습니다.
이 백분율이 소송에서 가장 큰 항목을 만듭니다. 다치지 않았더라면 벌었을 임금, 일실수입입니다. 계산 구조는 단순합니다. 소득에 상실률을 곱하고, 일할 수 있었을 나이까지 남은 기간을 곱합니다. 단순한 만큼 잔인한 데가 있습니다. 월 삼백만 원을 벌던 마흔 살에게 상실률 몇 퍼센트가 인정되느냐에 따라, 일실수입은 수천만 원 단위로 생기기도 하고 통째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공단의 판정과 법원의 감정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등급이 나왔는데 법원 감정에서 영구 장해가 부정되는 경우도 있고, 등급을 받지 못했는데 법원에서 상실률이 인정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정 결과가 법원을 자동으로 묶는 것은 아니지만, 실무에서 감정서를 넘어서는 판단은 드뭅니다. 그래서 산재 손해배상의 승부처는 법정의 변론보다 감정실에서 먼저 정해지는 일이 많습니다.
공단과 법원이 따로 움직인 사건
앞선 글 — 〈산재 휴업급여, 공단이 주는 돈과 못 주는 돈〉 — 에서 다룬 그 공장 사고가 정확히 이 자리에서 꺾였습니다.
산재는 승인됐고, 다친 분은 넉 달 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공단의 기준으로는 분명히 무거운 사고였습니다. 소송의 청구서도 그 무게로 쓰였습니다. 1억 원에 가까운 청구의 중심은 일실수입이었고, 신체감정에서 노동능력 상실이 인정되면 청구를 더 키우겠다는 예고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체감정의 결과가 반대로 나왔습니다. 영구적인 노동능력 상실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상실률이 0이면 곱셈 전체가 0입니다. 상대방은 가장 큰 항목을 스스로 지우고 간병비와 위자료로 청구서를 다시 썼고, 청구 금액은 3분의 1이 줄었습니다. 저는 그 소송에서 물어주는 쪽을 대리하고 있었습니다. 공단의 판정과 법원의 감정이 따로 움직인다는 것 — 그 한 가지 사실이 그 소송의 크기를 정했습니다.
감정이 정하는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돈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감정이라는 제도의 무게를 처음 실감한 곳은 민사 법정이 아니었습니다.
몇 해 전, 살인 사건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의뢰인은 오랜 세월 정신질환을 앓아 온 사람이었고, 병이 가장 깊어진 시기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재판의 처음부터 끝까지, 쟁점은 하나였습니다. 범행의 순간에 병이 이 사람의 판단을 어디까지 삼켰는가. 그것을 재는 제도가 정신감정입니다.
1심 법원은 여러 해의 진료기록과 범행 전후의 정황을 근거로 심신미약을 인정했습니다. 형법은 심신미약이 인정되면 형의 폭 자체를 절반으로 줄이도록 정해 두었습니다. 선고는 권고형의 가장 아래쪽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검사가 항소했습니다. 형이 너무 가볍다는 것, 그리고 병이 낫지 않았으니 위험하다며 위치추적 전자장치까지 청구했습니다. 저희는 항소심에서 정신감정을 다시 신청해 관철시켰고, 몇 달에 걸친 감정 끝에 전문의의 결론이 법원에 도착했습니다.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 — 그 감정서는 형을 깎는 칼이 아니라 더 무거운 처분을 막는 방패가 됐습니다. 항소는 전부 기각됐고, 전자장치 없이 형이 확정됐습니다.
민사의 감정은 돈의 크기를 정하고, 형사의 감정은 형의 길이를 정합니다. 결국 감정이란 재판부가 자기 눈 대신 전문가의 눈을 빌리는 절차이고, 한 번 빌린 눈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그 앞에 서는 일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감정대에 오르기 전에
그래서 다친 분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감정 그 자체보다 감정에 올라가는 기록입니다.
감정의는 당사자의 하소연이 아니라 기록을 봅니다. 사고 직후부터 이어진 의무기록, 증상을 의사에게 말한 흔적, 치료의 연속성. 병원에 말하지 않은 통증은 감정에서 존재하지 않는 통증입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진료실에서 말하고, 그 말이 기록으로 남게 하는 것 — 소송 몇 년 전의 이 습관이 감정 결과를 바꿉니다. 시점도 중요합니다. 증상이 고정되기 전의 감정은 한시장해로 줄어들기 쉽고, 이전에 앓던 병력이 있다면 기왕증 기여도라는 이름으로 상실률이 깎이는 공방이 붙습니다. 숨길 일이 아니라 준비할 일입니다.
그리고 등급의 숫자로 소송의 크기를 미리 재단하지 마십시오. 등급이 낮게 나왔다고 소송이 작아지는 것도, 등급이 높다고 그만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등급과 감정은 따로 움직이고, 이미 받은 장해급여는 소송에서 같은 항목의 돈에서만 빠집니다. 이 공제의 규칙은 앞선 글에 적어 두었습니다.
장해등급 결정 통지서를 받아 든 지금이, 법원의 감정을 준비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