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 2026년 7월 15일 · 변호사 김영빈
교통사고사실확인원 — 경찰이 정리한 그 종이, 결론이 “아닙니다”
교통사고 후 경찰서가 발급하는 교통사고사실확인원 — 발급 방법(민원실·정부24), 서식의 칸별 해부, 그리고 맨 아래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문구의 진짜 의미. 확인원에 '신호위반·충격'으로 적혔지만 도로교통공단 사고 분석과 진료기록 감정으로 무죄가 선고된 사건, 사고내용 괄호 속 당사자 진술 한 줄이 억대 민사 청구의 뼈대가 된 사건 — 이 서류가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인 이유.
맨 아래에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보험사도 법원도 이 서류부터 찾죠.
신호 또는 지시 위반
몇 해 전, 창원의 한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던 승용차가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피해자 분은 병원에서 꽤나 긴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사고를 접수한 경찰서가 발급한 종이에는 이렇게 적혔습니다.
사고원인: 신호 또는 지시 위반 사고내용: 적색신호에 일시정지하지 않고 우회전하다 … 차량 우측 뒤 측면부분으로 충격하였다.
교통사고사실확인원. 사실확인서라고 부르는 분들도 많은데, 정식 이름은 확인원입니다. 이 종이만 보면 사건은 끝나 있었습니다. 신호를 어겼고, 사람을 쳤고, 다쳤다. 세 문장이 전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요.
신호위반은 이른바 12대 중과실이라, 종합보험에 들어 있어도 합의가 되어도 형사처벌의 예외가 닫히는 자리입니다. 운전자는 그대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이 사건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조금 아래에서 이어가고, 먼저 이 종이를 어떻게 확보하는지, 그리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보는 게 순서겠습니다.
확보하는 법
발급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사고 당사자라면 경찰서 민원실에서 신청할 수 있고, 정부24(gov.kr)에서 온라인으로도 발급됩니다. 온라인 발급본에는 문서확인번호가 함께 찍혀 나와서, 받은 쪽에서 발급일로부터 90일 안에 진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고를 접수했다고 바로 나오는 서류는 아닙니다. 경찰이 사고를 조사해서 확인해 줄 사실이 정리된 뒤에야 발급됩니다. 그리고 신청할 때 이 서류를 어디에 쓸 것인지 용도를 적게 되어 있는데, 그 용도가 서류에 그대로 인쇄됩니다.
종이 한 장의 해부
교통사고사실확인원은 경찰서 교통조사계가 만드는 서류입니다. 사고가 접수되어 조사가 이루어진 뒤에, 당사자가 경찰서 민원실이나 정부24에서 발급받습니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서식이 정해져 있는, 형식이 꽤 엄격한 문서입니다.
한 장짜리 표에 이런 칸들이 있습니다.
- 접수번호 — 이 사고가 경찰에 공식 기록으로 존재한다는 표시입니다.
- 발생일시·장소, 사고유형 — 차대차, 차량단독, 차대사람 중 체크됩니다.
- 사고원인 — “신호 또는 지시 위반”, “안전운전의무위반” 같은 한 줄이 들어옵니다.
- 피해내용 — 사망·부상 몇 명, 물피 얼마.
- 사고내용 — 조사관이 정리한 사고 경위가 서너 문장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에, 당사자가 현장에서 한 말이 괄호로 함께 적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 용도 — 이 칸이 재미있습니다. “법원 제출용”, “보험회사 제출용”. 이 종이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서류가 스스로 알고 있는 셈입니다. 발급받을 때, 신청하는 내용대로 보통 적힙니다.
- 뒷장에는 사고현장약도가 붙습니다. 신호 상태, 차량의 진행 방향, 충돌 지점이 축척 있는 도면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맨 아래, 참고사항에 이 문장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본 확인서는 보증 또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종이를, 보험사 보상 담당자가 가장 먼저 요구하고, 민사 소장에는 갑호증으로 붙어 들어가고, 상대방도 변호사도 다들 이것부터 찾습니다.
모순은 아닙니다. 저 문장의 뜻은 “이 종이 한 장으로 과실과 책임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에 가깝습니다. 확인원은 경찰이 사고를 취급한 사실과 그 개요를 확인해 주는 서류이지, 누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판정하는 서류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과실비율도, 배상책임도, 상해와 사고 사이의 인과관계도 적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실무에서 이 종이가 그렇게 겸손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사고 이후에 만들어지는 거의 모든 판단 — 보험사의 과실 협상, 상대방의 청구, 수사기관의 시선 — 이 이 종이에 적힌 몇 문장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인데, 받아 든 사람 눈에는 결론처럼 보입니다. 양쪽 모두에게요.
그 간격이, 제가 아는 두 사건을 정반대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다.
첫 번째 — 종이에 적힌 대로 끝나지 않은 사건
처음 이야기한 교차로 사건으로 돌아갑니다.
확인원과 공소장의 문장만 보면 다툴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신호위반도, 충돌도, 진단서도 서류로 다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 보면 볼수록, 서류의 문장과 영상의 장면 사이에 틈이 보였습니다. 피해자가 차의 앞을 가로막은 게 아니라, 차량의 우측 뒤 측면에 부딪혔습니다. 차가 피해자를 향해 간 그림이 아니라, 피해자가 되려 차에 부딪힌 그림으로 볼 여지가 있는 상황이었죠.
이럴 때, 변호인이 법원에 요청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 사고 영상을 도로교통공단에 보내 분석해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사건에서의 회신은 이랬습니다 — 운전자가 위험을 인지할 수 있었던 시점에 급제동했더라도 충돌을 피하기는 어려웠고, 피해자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진행 방향을 가로막을 것까지 예상하기는 어려웠을 가능성이 있다.
신호위반이라는 과실 자체는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형사책임은 과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성립하지 않고, 그 과실 때문에 사고가 났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충돌이었다면, 신호위반과 사고 사이의 인과가 끊어집니다.
둘, 피해자의 진료기록을 법원을 통해 제출받고, 감정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진단서에는 여러 상해가 적혀 있었습니다. 감정 결과는 달랐습니다 — 일부 상해는 진단할 근거가 확인되지 않고, 일부는 이 사고와 인과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으며, 나머지는 영상의학적 근거 없이 환자의 증상 호소에 따른 진단으로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확인원에 “충격하였다”라고 적혔던 사건입니다. 그 문장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부딪힌 것은 사실이니까요. 다만 그 종이에 적히지 않는 것들 — 피할 수 있었는지, 다친 것이 그 사고 때문인지 — 이 형사책임의 전부를 정했습니다. 확인원은 사건의 요약처럼 생겼지만, 정작 사건을 결정하는 질문들은 그 종이 바깥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 — 괄호 한 줄이 소장이 된 사건
이번에는 반대 방향의 사건을 볼까요?
컨테이너 화물차가 국도 램프 구간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오른쪽으로 넘어졌습니다. 가드레일과 옆에 서 있던 차까지 부쉈고, 차주는 안전벨트에 매달린 채로 구조됐습니다. 확인원의 사고원인 칸에는 이렇게 적혔습니다.
사고원인: 안전운전의무위반
운전자 잘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고내용 칸의 맨 끝, 괄호 안에 이런 문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진술인은 적재함 내부에 적재물이 제대로 고정이 되어 있지 않아 좌회전 중에 적재물이 쏠려 우전도 되었다는 진술임)
사고 직후 경황이 없는 와중에 운전자가 조사관에게 한 말입니다. 조사관은 자기 판단과 별개로, 당사자의 진술을 괄호로 병기해 두었습니다.
몇 달 뒤, 이 괄호는 민사 소장의 청구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화물차의 적재는 화주 쪽에서만 하는 구조였습니다. 기사는 열쇠와 컨테이너 잠금장치를 넘기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작업이 끝나면 송장을 받아 출발합니다. 화물이 어떻게 실렸는지 기사가 관여할 수 없는 시스템이죠. 그런데 수십 톤짜리 화물이 결박 없이, 한쪽으로 치우친 채 실려 있었다면 — 커브에서 차가 넘어간 원인은 운전대가 아니라 적재함 안에 있게 됩니다.
소장에는 교통사고사실확인원이 갑호증으로 붙었습니다.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사고 직후의 진술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로요. 실황조사서로는 제한속도를 지켰고 음주도 없었다는 점을 함께 세웠습니다. 억대의 수리비가 걸린 청구의 뼈대가, 사고 당일 현장에서 한 말 한 줄 위에 서 있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서늘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핸들을 급하게 꺾어서요”라고 말했다면, 같은 종이가 정반대의 물길을 팠을 겁니다. 현장에서 경찰에게 한 말은 이렇게 서류에 남아, 몇 달 뒤 몇 년 뒤의 서면까지 따라옵니다.
이 종이를 받아 드신 분께
교통사고사실확인원을 손에 들고 계신 분이라면, 세 가지만 남기고 싶습니다.
첫째, 사고내용 칸을 문장 단위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내 진술이 어떻게 요약되어 있는지, 사고원인이 어느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는지. 그 몇 문장이 보험사와 상대방이 읽게 될 이 사고의 첫 번째 판본입니다.
둘째, 그 종이에 적힌 문장이 불리하더라도, 그것이 결론은 아닙니다. 확인원에는 과실비율도 인과관계도 적히지 않습니다. 다툴 지점은 대개 그 종이 바깥에 있습니다 — 블랙박스, 사고 영상 분석, 진료기록. 위 교차로 사건처럼, 서류의 문장이 전부 한 방향을 가리켜도 결론은 반대편에 설 수 있습니다.
셋째, 반대로 그 종이가 유리한 한 줄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괄호 안의 진술 한 줄이 민사 청구의 뼈대가 된 것처럼요. 어느 쪽이든, 사고 직후에 하는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그 말은 지나가지 않고 서류에 남습니다.
사고 직후 그 자리를 떠나는 문제, 그리고 형사 합의가 끝난 뒤에 민사 소장이 오는 문제는 각각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