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 · 2026년 7월 5일 · 변호사 김영빈
형사 합의를 했는데, 민사 소장이 또 왔습니다
'민형사상 일체' 문구 없이 쓴 형사 합의, 또는 합의가 안 된 사건에서 민사 손해배상은 별개 절차로 살아서 옵니다. 배상액의 뼈대가 법원 지정 병원의 신체감정에서 먼저 계산되는 구조, 인과관계의 의학 공방, 형사 합의금이 위자료 저울에 오르는 방식, 산재 급여 공제의 대응관계 원칙, 사용자책임 — 배상하는 쪽을 대리해 7천만 원 가까운 청구를 3천만 원대에서 방어한 사건의 기록.
배상액은 법정보다 병원의 감정 절차에서 먼저 계산됩니다
형사 사건의 합의서에는 보통 이런 문구가 들어갑니다.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제대로 쓰인 형사 합의는 민사까지 한 번에 닫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 문구가 있으면 나중에 손해배상 소송이 오더라도 원칙적으로 막아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입니다. 형사 선처가 급해 처벌불원 취지로만 합의서를 쓴 경우, 돈은 오갔는데 민사 이야기가 문구에 없는 경우, 그리고 애초에 합의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 — 이럴 때 민사 손해배상은 별개의 절차로 살아서 옵니다. “합의금을 냈는데 또 물어내라고요?”라는 질문이 나오는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그리고 민사까지 닫지 못한 합의금은, 배상액에서 자동으로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민사 재판에서 배상액의 뼈대는 판사가 정하기 전에, 병원에서 먼저 계산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다친 손해배상 소송의 한복판에는 언제나 의학이 있습니다. 치료에 얼마가 필요한지, 돌봄이 필요했는지, 장해가 남는지, 애초에 그 행위로 그 상해가 생길 수 있는지 — 전부 의사의 언어로 다퉈지고, 판사는 그 위에서 계산합니다.
오늘은 그 구조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제가 배상하는 쪽을 대리했던 사건 하나로 적어 보려 합니다. 7천만 원에 가까운 청구가 3천만 원대에서 마무리된 사건 — 그 사이에서 무엇이 깎였고 무엇이 깎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계산의 몇 할이 병원에서 이뤄졌는지를 열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건이었나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작업장에 늘 놓여 있어 일상적으로 쓰는 공구를 의뢰인이 장난 삼아 동료에게 겨눴고, 순간의 그 장난이 하필 몸의 약한 곳을 건드리며 장기를 다치게 했습니다. 몇 달에 걸친 치료가 필요한 중상이었습니다.
의뢰인은 형사 재판을 받았고, 피해 동료에게 2천만 원 가까운 합의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민사 법정이 열렸습니다. 피해자는 의뢰인과 회사를 상대로 7천만 원에 가까운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입원 기간 곁에서 돌봄이 필요했던 비용, 즉 개호비가 한 축이었고 — 청구의 큰 덩어리는 위자료였습니다.
배상할 일 자체를 부인할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의뢰인도 자신의 행위로 동료가 다쳤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싸움터는 ‘배상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어떤 항목으로 배상하느냐’였습니다. 사람이 다친 손해배상 소송의 대부분은 이 자리에서 결판이 납니다.
배상액은 감정 절차에서 먼저 계산됩니다
민사 재판이 시작되면 법원은 대학병원 한 곳을 지정해 신체감정을 맡깁니다. 원고도 피고도 아닌, 법원이 정한 병원입니다. 감정의는 진료기록과 영상, 직접 진찰을 토대로 회신합니다. 치료에 얼마나 걸렸는지, 입원 기간 돌봄이 필요했는지, 노동능력을 몇 퍼센트 잃었는지, 그 장해가 평생 가는지 일정 기간에 그치는지.
이 회신서 한 장이 사건의 지형을 바꿉니다. 실제로 이 사건에서도 감정서가 도착하자 상대방은 청구금액을 다시 계산해 청구취지를 변경했습니다. 감정이 청구서를 다시 쓰게 만든 겁니다. 개호비도 그렇습니다. 감정의가 ‘입원 기간 중 성인 1인의 돌봄이 필요했다’고 회신했고, 법원은 그 기간에 노임 단가를 곱해 산출된 금액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실제 입원 일수를 따져 그 기간을 다퉜지만, 법원은 감정 결과를 택했습니다.
손해배상에서 감정서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습니다. 판사의 계산기는 상당 부분 의사의 펜 위에서 두드려집니다. 그래서 이런 소송의 승부처는 법정만큼이나 감정 단계에 있습니다 — 감정 전에 어떤 자료가 병원에 가는지, 감정서의 어느 문장을 받아들이고 어느 문장에 보완을 구할지. 변호사가 의무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정도 일로 그런 상해가 가능한가 — 인과의 의학 공방
이 사건에는 의학이 개입한 자리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인과관계입니다.
문제의 공구는 위험물로 관리되던 물건이 아니라 작업자들이 매일 손에 쥐는 도구였고, 통상적인 사용 강도로는 사람이 다칠 일이 없다고 여겨지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설비 쪽에서는 ‘통상의 용법으로는 위험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소견이 나왔고, 회사도 ‘그 짧은 순간의 사용으로 그런 손상이 생기기는 어렵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반면 피해자를 진단한 담당의는 ‘그 부위가 원래 약한 곳이어서 이런 손상이 가능하다’고 회신했습니다. 같은 사고를 두고 의학의 언어들이 갈린 겁니다.
법원은 상해와 행위의 인과를 인정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법리 하나를 세웠습니다. 같은 일을 겪고도 누구나 이런 중상을 입는 것은 아니라면 — 피해자의 신체적 소인이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기여했다면, 그것이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배상액을 정할 때 참작할 수 있다는 대법원 법리입니다. 피해자를 탓하는 논리가 아닙니다. 한 사람에게 손해 전부를 지우는 것이 공평하지 않을 때 법원이 쓰는, 공평의 도구입니다. 몸의 사정이라는 의학의 영역이, 배상액이라는 법의 숫자로 번역되는 자리입니다.
위자료 저울에 올린 것들
위자료는 영수증도 감정서도 없는, 판사가 여러 사정을 저울에 올려 정하는 항목입니다. 바로 그래서 변론이 개입할 자리가 가장 넓은 항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저울에 이런 사정들을 올렸습니다. 두 사람이 원한도 다툼도 없이 평소 장난을 주고받던 사이였고, 피해자 자신도 수사기관에서 악의가 있었던 게 아니라는 취지로 진술했다는 것. 회사조차 그 도구의 위험을 몰라 관련 안전교육이 없었다는 것. 감정 결과 장해가 평생 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에 그치는 한시적인 것이라는 점. 그리고 형사 단계에서 지급된 합의금 — 이 사건의 합의는 민사까지 닫는 합의가 아니었기에 그 돈이 배상액에서 자동으로 차감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피해 회복에 쓰인 돈이라는 사실은 위자료를 정하는 저울에 올라갑니다. 잘못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해칠 뜻으로 저지른 일과 위험을 몰랐던 경솔함은, 그 저울에서 무게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법원은 이 사정들과 피해자가 입은 상해의 무게를 함께 올려 위자료를 정했습니다. 청구된 위자료의 40% 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안 빠지는 돈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 사건의 가장 쓰린 대목을 정직하게 적겠습니다.
피해자는 산재 처리로 근로복지공단에서 천만 원이 넘는 요양급여를 이미 받은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돈이 배상액에서 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미 받은 돈을 또 받으면 이중 아니냐는, 상식적으로 보이는 주장입니다.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항소심까지 갔지만 결론은 같았습니다. 이유는 손해배상의 오래된 규칙에 있습니다. 산재 급여는 ‘같은 항목’의 손해에서만 공제됩니다. 휴업급여는 잃은 수입에서, 요양급여는 치료비에서, 간병급여는 개호비에서 — 서로 대응하는 항목끼리만 빠집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피해자 측은 치료비를 아예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청구한 것은 개호비와 위자료뿐이었습니다. 요양급여는 치료비에 대응하는 돈이므로, 치료비 청구가 없는 자리에서는 공제할 곳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규칙은 청구하는 쪽에게는 설계의 문제이고, 방어하는 쪽에게는 한계의 문제입니다. 어느 항목을 청구서에 올리고 어느 항목을 빼느냐에 따라, 같은 사고에서도 오가는 돈이 달라집니다. 그 산수의 규칙을 소송 전에 아는 것과 소송 중에 배우는 것은, 결과에서 차이가 납니다.
회사는 왜 일부만 책임졌나
이 사건에는 피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회사입니다.
직원이 업무 중에 저지른 일이면, 장난이었더라도 회사는 사용자로서 배상 책임을 집니다. 우리 법원은 회사가 이 책임을 벗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사건 법원은 형평을 이유로 회사의 책임을 전체 배상액의 일정 비율로 제한했습니다. 위험해질 수 있는 도구가 작업장에 늘 놓여 있었는데 안전교육이 없었다는 사정과, 그래도 사고의 직접 원인은 개인의 돌발 행동이었다는 사정 — 그 사이 어딘가에 법원이 그은 선입니다. 사고를 당한 쪽에서 보면 ‘회사에는 전액을 못 받는다’는 뜻이고, 회사 입장에서 보면 ‘직원의 장난도 내 책임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판결은 7천만 원에 가까웠던 청구를 3천만 원대에서 정리했습니다. 개호비는 감정대로, 위자료는 청구의 절반 아래로. 회사는 그 일부 범위에서 함께 책임을 지게 됐고, 쌍방이 다퉜던 항소심도 1심의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기억하실 것은 액수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형사 합의서의 문구가 민사의 운명을 가릅니다 — ‘민형사상 일체’라는 여덟 글자가 들어갔는지 아닌지가, 소송 하나가 오고 안 오고를 통째로 가르기도 합니다. 합의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그 문구를 확인하는 것이, 나중에 법정에서 다투는 것보다 백 배 쌉니다. 몸이 다친 사건의 배상액은 병원에서 먼저 계산됩니다 — 감정서 한 장이 청구서를 다시 쓰게 하고, 판결의 뼈대가 됩니다. 손해는 항목별로 계산되고 공제도 항목끼리만 됩니다 — 청구하는 쪽은 항목의 설계가, 방어하는 쪽은 그 규칙을 아는 것이 곧 돈입니다.
사고는 한순간이지만 그 뒤의 계산은 형사와 민사, 두 번에 걸쳐 옵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계산은 법전과 의무기록을 같이 읽는 사람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어느 쪽에 서 계시든, 두 번째 계산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