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 2026년 6월 24일 · 변호사 김영빈

실패하는 강간 고소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고가 아니라, 입증의 설계입니다. 무죄를 만들어 본 변호사가 그 반대편에서 짚는, 고소가 무너지는 자리. 72시간과 해바라기센터부터 진술의 정직까지, 실패하는 고소의 공통점을 적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소를 ‘신고’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당한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하면, 수사기관이 알아서 진실을 밝혀 줄 거라고요.

그러나 형사 절차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밝히는 곳이 아닙니다. ‘무엇이 입증되는가’를 가리는 곳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과, 법정에서 사실로 인정되는 일은 다릅니다. 그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이 고소인이 해야 할 일이고, 대부분의 고소가 무너지는 것도 바로 그 간격에서입니다.

조금 불편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강간 사건에서 무죄를 여러 차례 받아낸 적이 있습니다. 피고인이 결백해서가 아니라 —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 피해자의 진술 외에는 그 일을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술은 진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진실해 보이는 것과 증명되는 것은 다릅니다.

그 법정의 반대편에서, 오늘은 고소를 생각하는 분께 말씀드리려 합니다. 무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이, 무죄가 나오지 않는 고소는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먼저, 무너지는 고소들

제가 본 실패하는 고소에는, 사연은 저마다 달라도 어딘가 약점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데, 한 걸음씩 어긋난 자리에서 사건이 꺾였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로 먼저 보시겠습니다. 닮은 자리에 서 계시다면, 늦기 전에 방향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 회식 자리에서 정신을 잃을 만큼 마셨고, 다음 날 아침 낯선 방에서 깨어났다고 해 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각조각 떠오르지만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우선 집에 가서 씻고, 며칠을 혼란 속에 보냅니다. 일주일 뒤 마음을 굳히고 경찰서에 가지만, 그때는 몸에 남았을 증거가 모두 사라진 뒤입니다. 남은 것은 본인의 진술뿐. 사건은 그렇게, 시작도 하기 전에 가장 강한 무기를 잃습니다.

두 번째 사람. 아는 사람에게 피해를 당했다고 해 봅니다. ‘설마 내 말을 안 믿겠어’라는 생각에, 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반년이 지나 더는 견딜 수 없어 고소를 하지만, 그사이를 메워 줄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가해자는 “관계는 있었지만 합의된 것이었다”고 말하고, 둘의 말만 남습니다. 진실은 한쪽에 있지만, 법정은 진실이 아니라 증명을 봅니다.

세 번째 사람. 억울한 마음에, 잘 기억나지 않던 부분까지 ‘분명히 이랬다’고 단정해 진술을 채웠다고 해 봅니다. 그런데 그중 한 장면이 CCTV에 찍힌 시간과 어긋납니다. 상대 변호인은 바로 그 한 군데를 파고듭니다. “이 부분이 사실과 다른데, 나머지는 어떻게 믿습니까.” 피해 자체는 분명한 진실이었는데, 부풀린 한 줄이 진술 전체를 의심받게 만듭니다.

끝에서 거꾸로 봅니다 — 왜 무너지는가

세 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건이 위태로워집니다. 왜 그런지는, 형사재판의 끝에서부터 거꾸로 짚으면 보입니다.

형사재판의 끝점은 ‘유죄판결’입니다. 그리고 유죄판결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이 있을 때만 내려집니다. 판사가 피해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만으로는 처벌이 되지 않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합리적으로 남으면, 그 이익은 피고인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이 형사재판의 철칙입니다.

문제는 성범죄의 속성입니다. 대개 둘만 있는 공간에서, 목격자 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많은 사건이 결국 ‘피해자의 진술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한 가지로 좁혀집니다.

그렇다면 진술의 신빙성은 무엇이 떠받칠까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진술과 맞아떨어지는 객관적 증거, 둘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 셋째는 피해 직후의 즉각적인 정황입니다. 이 세 기둥이 튼튼할수록 진술은 ‘의심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비어 있을수록 진술은 ‘그럴듯한 주장’에 머뭅니다. 앞의 세 사람은 저마다 이 기둥 하나씩을 비워 둔 채 법정에 선 것입니다.

그러니 거꾸로 보면 답이 분명해집니다. 재판에서 이기는 준비는 법정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건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됩니다. 그 세 기둥을 하나씩 세워 보겠습니다.

지금 막 겪으셨다면, 이 부분만 먼저 읽으십시오

첫 번째 기둥, 객관적 증거부터입니다. 그런데 이 증거는 시간을 다투기에 순서를 당겨 말씀드립니다. 사건 직후라면, 다른 설명은 제쳐 두고 지금 이 부분만 보셔도 됩니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몸에 남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씻으면 사라집니다.

성폭력 피해의 직접 증거 — 가해자의 DNA, 체액, 몸에 남은 상처 — 는 보통 사건 후 72시간 안에 채취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가장 확실한 증거가 영영 사라집니다. 그래서 피해 직후라면, 씻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강해도 샤워·양치·옷 갈아입기·소변을 잠시만 미루고, 입었던 옷은 비닐이 아닌 종이봉투에 담아, 곧바로 ‘해바라기센터’로 가셔야 합니다.

해바라기센터를 모르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국가가 운영하는 통합지원센터로, 전국에서 365일 24시간 열려 있고, 비용은 전액 무료입니다. 국번 없이 1366으로 전화하면 가까운 센터로 연결됩니다. 이곳에서는 증거 채취(응급키트)부터 산부인과·정신과 진료, 진단서 발급, 심리 상담, 경찰 연계까지 한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지금 당장 고소를 결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증거만 먼저 확보해 두고, 신고 여부는 마음이 정리된 뒤에 결정할 수 있습니다. 센터는 채취한 증거를 보관해 줍니다.

제가 본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마음을 정한 다음에 가야지’ 하며 며칠을 흘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앞의 첫 번째 사람이 잃은 것이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은 한 달 뒤에도 정할 수 있지만, 72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머지 두 증거는 ‘시간’입니다

첫 번째 기둥이 시간 안에 붙잡아야 할 ‘물증’이었다면, 나머지 두 기둥 — 일관성과 즉각적인 정황 — 은 ‘시간’이 만들어 줍니다.

피해 직후의 행동은 그 자체로 증거가 됩니다. 곧바로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 울면서 건 전화, 그날 찾아간 병원의 기록. 이런 것들은 나중에 ‘최초의 진술’로 남아, 본인의 말이 사후에 지어낸 것이 아님을 증명해 줍니다. 사소해 보이는 메시지 한 줄이 법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의 경우는 가혹합니다. 충격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지내다 한참 뒤에 고소를 하면 — 그 침묵의 기간이, 진실이라 해도 — 법정에서는 약점이 됩니다. “정말 그런 일을 겪었다면 왜 가만히 있었느냐”는 물음이 던져집니다. 부당한 물음입니다. 피해자가 곧바로 신고하지 못하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 침묵이 피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그러나 부당함과는 별개로, 그 물음은 실제로 던져집니다. 앞의 두 번째 사람이 반년의 침묵 끝에 마주한 물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알고 대비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역설 — 강한 진술은 매끄러운 진술이 아닙니다

여기서 가장 힘주어 드리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무죄를 받아 본 변호사로서 드리는 말입니다.

고소를 준비하는 분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진술을 ‘더 강하게’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기억이 흐릿한 부분을 더 선명하게, 애매한 부분을 더 단정적으로, 정도를 조금 더 무겁게. 억울함이 클수록 이 유혹도 커집니다.

그런데 — 방어하는 변호사가 노리는 것이 정확히 그 지점입니다.

저는 피고인을 변호할 때 피해자의 진술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진술 안에서, 또 진술과 객관적 증거 사이에서 ‘맞지 않는 한 군데’를 찾습니다. 처음 경찰에서 한 말과 법정에서 한 말이 어긋나는 곳, 시간을 따져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곳, CCTV에 찍힌 장면과 다른 곳. 그런 균열 하나가 발견되면, 그것은 진술 전체로 번집니다. “이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믿는가.” 그렇게 ‘합리적인 의심’이 만들어지고, 무죄가 됩니다. 앞의 세 번째 사람이 무너진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제가 다툰 사건들이 정확히 그 자리에서 갈렸습니다. (검증받지 못한 진술 하나로 사건이 어떻게 멈춰 서는지는 다른 무죄 사건에 적어 두었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거꾸로입니다. 가장 강한 진술은 빈틈없이 매끄러운 진술이 아니라, 과장이 없는 진술입니다. 기억나는 것은 기억나는 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은 “그 부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는 진술. 어설프게 메운 빈칸 하나보다, 정직하게 비워 둔 빈칸이 훨씬 강합니다. 무리해서 완벽해지려다 깨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함을 지켜서 이기는 것입니다.

고소를 망설이게 하는 오해들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붙잡는 몇 가지 오해를 정리하겠습니다.

“합의하면 끝 아닌가요.” 아닙니다. 2013년부터 성범죄는 친고죄가 폐지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피해자가 고소해야만 처벌할 수 있었고 고소를 취소하면 사건이 끝났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고소가 없어도 수사할 수 있고, 피해자가 합의하거나 고소를 취소해도 국가가 처벌할 수 있습니다. 합의는 형을 줄이는 사정일 뿐, 면죄부가 아닙니다.

이 변화에는 고소인이 알아 둘 만한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가해자나 그 주변이 “없던 일로 하자”며 합의를 미끼로 시간을 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사이 사라지는 것은 증거입니다. 합의 협상과 증거 확보는 별개로 두셔야 합니다. 받을 것을 받는 일과, 남길 것을 남기는 일은 동시에 진행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이제 늦었겠죠.” 꼭 그렇지 않습니다. 강간죄의 공소시효는 10년이고, DNA 같은 과학적 증거가 있으면 거기서 다시 10년이 늘어납니다. 그리고 미성년일 때 당한 피해는, 시효가 그때부터 흐르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성년이 된 날부터 시작됩니다. 13세 미만이거나 장애가 있는 분을 상대로 한 성범죄는 아예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오래되어 덮어 두었던 일이 아직 살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무고로 역고소당하면 어쩌죠.” 무고죄는 ‘거짓인 줄 알면서 신고’할 때 성립합니다. 사실을 말하는 한 무고가 아닙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각색’은 여기서도 위험합니다. 없는 일을 더하거나 부풀린 부분이 무너지면, 사건 전체가 의심받고 드물게는 무고의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정직이 가장 안전한 길인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고소는, 사건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됩니다

처음에 만난 세 사람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증거가 사라지도록 기다린 사람, 끝내 입을 열지 못한 사람, 억울함에 없는 말을 보탠 사람. 처지는 다르지만 한 가지가 같습니다. 누구도 ‘지금 손에 있는 사실’을 제때 붙잡아 두지 않았다는 것. 어떤 이는 시간이, 어떤 이는 침묵이, 어떤 이는 욕심이 그 일을 가로막았습니다. 그것이 실패하는 고소의 공통점입니다. 사실은 저절로 남지 않습니다. 남겨 둔 것만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고소는 분노를 쏟아 내는 일이 아니라, 사실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설계는 고소장을 쓰는 날이 아니라, 사건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됩니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압니다. 그러나 무엇이 사실로 인정될지는, 그 일을 어떻게 증거로 남겼는지가 정합니다. 억울함이 저절로 증명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 그것이 거의 유일하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할 수 있는 일은 대개 남아 있습니다. 무엇을 남길 수 있고 무엇이 이미 늦었는지, 그것부터 확인하는 일이 고소의 진짜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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