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 2026년 6월 15일 · 변호사 김영빈
마약, 초범이 아니라도 집행유예 가능?
마약 사건이 여러 건 겹치고 동종 전력까지 있어도 집행유예가 가능했던 실제 기록. 무리한 무죄 대신, 형법상 집행유예 결격 여부를 행위 시점으로 따져 실형을 피한 변론입니다.
사건이 여러 건 얹혀 있어도, 오래전 전력이 있어도 — 집행유예의 문은 생각과 다른 곳에서 갈립니다.
가족은 무죄를 원했습니다
구치소에서 접견으로 처음 마주한 그분은 이미 답을 정해 두고 있었습니다.
“마약인데다 한 건도 아니고, 예전에 한 번 걸린 적도 있으니까요. 그냥 바라시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물으시는 목소리에는 기대가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변호사를 찾아오긴 했지만, 무언가가 달라질 거라고는 믿지 않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보다 더 절박했던 건 가족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무죄로 싸워 달라.” 가족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늘 그렇습니다.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일수록, 그가 죄를 인정한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기 어려워하십니다. 무죄를 호소하는 그 마음을 저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돈을 주시는 분은 가족분들이니, 그냥 무시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변호사가 가족의 바람을 그대로 받아 적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길 수 없는 무죄를 좇으면, 될 것도 놓칩니다
기록을 펼쳐 보면, 길은 가족이 원하는 쪽으로 나 있지 않았습니다.
피고인 본인은 이미 수사 단계에서부터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수사기관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까지 스스로 이야기한 상태였고, 제출된 증거에 대해서도 다툴 만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에서 변호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길 수 없는 무죄를 좇다가, 손에 쥘 수 있었던 결과까지 놓치는 것입니다.
인정할 것이 분명한 사건에서 억지로 무죄를 주장하면, 법정에는 한 가지 인상이 남습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인상은 양형에서 고스란히 불리하게 돌아옵니다. 반성은 형을 정하는 데 가장 무겁게 작용하는 사정 중 하나인데, 무리한 부인은 바로 그 반성을 스스로 지워 버리는 일이 됩니다. 가족이 바라는 무죄를 향해 달리는 순간, 실제로 가능했던 집행유예마저 멀어지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을 그었습니다. 당사자의 의사를 분명히 확인한 뒤, 가족분들께 말씀드렸습니다. “무죄로는 가지 않습니다.” 야속하게 들렸을 겁니다. 그러나 변호인이 해야 할 일은 듣기 좋은 방향이 아니라, 의뢰인에게 실제로 남는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비용을 가족이 부담하더라도, 선임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의뢰인 본인입니다. 저는 가족이 아니라 의뢰인을 위해 일합니다. 인정할 것은 정확히 인정하고, 이길 수 있는 자리에서 이긴다 — 사건의 방향은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길 수 있는 자리는 어디였나
문제는 그 ‘이길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조차도 처음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사건이 여러 개 얹혀 있었고, 오래전이지만 동종 전력도 있었으니까요. 마약 사건은 한 번 더 걸리면 실형, 사건이 겹치면 더 무겁게 — 많은 분들이 그렇게 알고 계시고,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날짜 순으로 다시 늘어놓다 보니, 한 가지가 눈에 걸렸습니다.
여러 건이 ‘줄줄이’ 벌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이 사건의 행위들이 일어난 시점은 — 함께 진행되던 다른 사건의 판결이 선고되기 전이었습니다. 사건들이 어지럽게 겹쳐 보여서 ‘재범에 재범’처럼 읽혔을 뿐, 시간의 순서를 차분히 세워 보면 그림이 달랐던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집행유예에는 법이 미리 닫아 둔 문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집행유예에는 법이 닫아 둔 문이 있습니다
형법은 집행유예를 줄 수 있는 경우를 정해 두면서, 한 가지 빗장을 걸어 둡니다.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한 판결이 확정된 때부터, 그 형의 집행을 마치거나 면제된 뒤 일정 기간 안에 다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무거운 판결을 받고도 그 기간 안에 또 죄를 지은 사람에게까지 유예의 기회를 주지는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핵심은 ‘그 판결 이후에 다시 저질렀는가’입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을 이 사건에 던져 봤습니다. 이분의 행위는 다른 사건의 판결 ‘이후’에 벌어진 일인가, 아니면 ‘이전’의 일인가.
답은 명확했습니다. 이 사건의 행위들은 모두 그 판결이 선고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사건이 여러 개라는 사실, 그 자체가 빗장을 거는 게 아닙니다. 빗장이 걸리는 건 ‘판결이 확정된 뒤에 또 저질렀을 때’이고, 이분은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겉보기에는 닫혀 있는 것 같던 문이, 시점을 따라가 보면 닫혀 있지 않았던 겁니다.
저는 이 점을 가장 앞에 세웠습니다. 반성한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 그런 이야기는 그다음입니다. 그전에 먼저, 이 사람은 법이 정한 의미에서 ‘집행유예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두어야 했으니까요. 양형은 막연한 선처 호소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유예의 문이 법적으로 열려 있다’는 토대를 깔아 둔 다음에야, 그 위에 반성과 사정이 의미를 갖습니다.
인정하되, 사실의 결까지 넘기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었습니다.
공소사실 중에는 사고판 거래가 있었는데, 기록을 보면 산 값과 판 값이 사실상 같았습니다. 남긴 이익이 없었던 거래였습니다. 이익을 노린 장사였다면 무언가 남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안 했다’는 변명을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사건의 방향은 인정이었으니까요. 다만 한 일을 인정하는 것과, 그 일의 ‘성격’까지 무겁게 단정당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익이 남지 않는 거래였다는 사정은, 적어도 이 거래를 ‘확정적인 의도를 가진 매매’로만 단정하기는 어렵게 만드는 사실이었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사실의 결까지 넘겨주지는 않는 것 — 그 한 끗이 양형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제야, 본인이 한결같이 보여 온 태도가 제 몫을 합니다. 수사 초기부터의 인정과 협조, 스스로 돌아본 시간, 오래 성실하게 살아온 흔적과 곁을 지키는 사람들 — 이 모든 사정은 ‘유예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토대 위에 놓일 때 비로소 형을 끌어내립니다. 토대 없이 늘어놓는 호소는 그저 호소로 흩어집니다.
무죄가 아니라, 사회로 돌아온 것
결과는 집행유예였습니다. 그리고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이 사건에서 결과를 가른 건 절절한 호소가 아니었습니다. 사건이 몇 개인지, 전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세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 가족이 그토록 원하던 무죄도 아니었습니다.
가능하지 않은 무죄를 끝까지 좇았다면, 이분은 ‘반성 없는 사람’이 되어 실형 쪽으로 떠밀렸을지도 모릅니다. 가족의 마음을 거슬러서라도 방향을 정하고, 무겁게만 보이던 자리에서 날짜의 순서를 한 번 더 세워 본 것 — 결과를 만든 건 그 두 가지였습니다. 나중에 가족분들도, 무죄라는 단어보다 이분이 사회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더 큰 것이었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약 사건이 여러 건 얹혀 있다고 해서, 또는 오래전 전력이 있다고 해서, 집행유예의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변호인의 일은, 의뢰인과 가족이 원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 닫혔다고 여겨지는 자리에서도 아직 따져 보지 않은 한 줄을 찾아, 정말로 이길 수 있는 곳을 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한 줄을 끝까지 세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