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2026년 5월 10일 · 변호사 김영빈
DNA 빼박인데 왜 무죄? — 형사변호사가 본 그것이 알고싶다 '안산 고잔동 사건'
DNA가 나왔는데 왜 무죄인가 — 그것이 알고싶다 안산 고잔동 사건을 형사변호사의 눈으로.
‘그것이 알고싶다’는 참 재미있는 프로그램이고, 지금도 종종 본방을 사수합니다.
어제자 (2026. 5. 9.) 또한 굉장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안산 고잔동 강도살인 사건. 2001년 9월에 부부가 침입강도에게 회칼로 당했고, 남편은 수십 차례 찔려 사망했습니다. 19년이 지나 보관돼 있던 절연테이프에서 DNA가 검출됐고, 그 DNA가 다른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A씨와 일치했습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고, 지금은 항소심이 진행 중입니다.
위화감을 느낀 건 한 줄짜리 사실이었습니다. A씨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 집에 간 적도 없다”는 전면 부인입니다.
이게 뭐지? 형사 사건을 다루는 변호사 시각으로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습니다.
1. DNA 빼박이 법리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한 가지 짚고 갑니다. “DNA 일치”는 형사 증거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증거에 속합니다.
- 일치 확률이 천문학적으로 낮습니다 (대략 수억~수십억 분의 1)
- 우연 일치 가능성이 사실상 0
- 같은 수법(가스배관 침입·테이프 결박·증거인멸)이 A씨의 다른 확정 사건에서 반복돼 있습니다
그래도 다툴 수 있는 영역이 0은 아닙니다. “내 DNA가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곧 내가 범행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사후에 우연히 들렀거나, 절연테이프 자체가 다른 경로로 현장에 도달했거나, 시료 오염 같은 가능성을 다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안산 고잔동 사건은 그 영역도 거의 닫혀 있습니다. 2001년 새벽 3시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가 회칼로 침입한 강도가 절연테이프로 부부를 결박한 자리에서 그 절연테이프에 부착된 DNA입니다. 우연 시료 오염 시나리오로 설명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2. “설마 진짜로 자기가 안 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A씨는 진짜 자기가 안 했다고 믿는 걸까요.
- 1차 가설: 진짜 그렇게 믿는다.
- 2차 가설: 본인은 안다, 단지 빠지고 싶다.
1차는 영화·드라마의 단골입니다. 해리·기억 왜곡·정신감정으로 풀리는 자리. 현실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25년 전 사건이 잘못 기억되는 일은 있지만, “내가 한 적 없다”의 확신으로 굳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게다가 2017년에 같은 수법으로 다른 사람을 강간한 사실이 이미 확정돼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패턴의 사람인지 본인이 가장 잘 압니다.
2차가 현실입니다. 본인은 압니다. 다만 인정하면 무기징역이고, 안 해도 무기징역입니다. 결과가 같다면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는 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무죄 주장입니다. … 일까요?
3. 그런데 더 합리적인 무죄 주장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 재미있는 부분이 - 사실 남겨져 있습니다.
안산 고잔동 사건은 단독 범행이 아닙니다. 2인조 강도단이었습니다(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최소한 방영분의 논조는 그러했지요). A씨와 함께 들어간 B씨가 한 명 더 있고, B씨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 이 구조에서 가장 합리적인 무죄 주장은 따로 있습니다.
“DNA는 내 것이 맞다. 같이 들어간 건 인정한다. 그런데 살인은 B씨가 했다. 나는 절연테이프로 결박만 했고, 회칼로 찌른 건 B씨다.”
이 카드의 법리적 효과를 봅시다.
- 강도살인(형법 §338) — 살인의 실행자가 누구냐가 결정적
- 강도상해(형법 §337) —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시점에 만료된 사안
즉 살인은 B씨가 했다고 풀어내고 자신은 강도상해 가담으로 좁히면(물론 그 길도 쉽지는 않겠지만 전면 부인보다는…), 공소시효 만료로 면소가 가능합니다. 무죄가 되는 게 아니라, 면소라는 지점에 도달하는 형태입니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다툼의 형태입니다.
4. 그런데 A씨는 그 카드를 안 씁니다
A씨의 1심 진술을 봅시다.
재판장: “그 집에 간 적도 없다는 것이냐?” A씨: “네.” 재판장: “공소사실에 있는 범행 일시 외에 다른 날에 그 집에 간 적이 있느냐?” A씨: “없었다.”
전면 부인입니다. 공범 분담 카드를 한 장도 안 썼습니다. 절연테이프 증거 자체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빼박 DNA 앞에서 가장 약한 카드를 들었습니다.
왜 이 약한 카드로 갔을까요. 두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가설 1 — 의뢰인의 인지 부조화
25년 동안 “범인이 아닌 나”로 살아왔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 narrative를 학습시켰습니다. 잡히는 순간 인정 = 25년 자기 부정입니다. 부분 인정조차 자기 부정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면, “공범” 인정이 곧 자기 인정이 됩니다. 그래서 통째로 부인합니다.
가설 2 — 변호의 사각지대
이 사건은 사선 변호인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 만합니다. 이런 사건을 누가 몇 백 받고 변호할까요. 무기징역이 거의 확정된 사건의 변호는 의욕이 안 나오는 자리입니다.
국선이라면 어떨까요. 국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일은 합니다. 다만 그게 변호의 전부가 됩니다. 학교 생활기록부에 “아이가 산만합니다”를 못 쓰니까 “집중력이 더 발전한다면 학업 성취에 진전이 있을 걸로 보임”이라고 쓰는 식입니다. 형식은 갖춰지지만 알맹이가 없습니다.
이 사건의 1심 진행을 보면 빈약함이 드러납니다.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가 “재판이 한 번에 끝나는 줄 알았다”며 취소를 시도했다거나, 절연테이프 증거 채택 동의 거부라거나… DNA가 빼박인 마당에 절연테이프 증거를 다투는 건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진짜 다툴 자리는 따로 있는데 거기는 안 들어갑니다.
뭐든간에, 의뢰인이 고집을 피우는데, 굳이 설득하지는 않았겠지요. 의뢰인이 자기 부정을 못 깨면 변호인이 정밀한 카드를 설계할 토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토대를 만들려면 의뢰인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건 정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5. 변호의 사각지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사선은 안 잡힙니다 (이런 사건을 받을 변호사가 없습니다)
- 국선은 의욕이 없습니다 (할 일은 하지만 그게 끝입니다)
- 의뢰인은 25년의 자기 부정을 깰 동기가 없습니다
- 그 결과 가장 빈약한 무죄 주장이 끝까지 갑니다
이건 시스템의 사각지대입니다. 합리적인 주장의 가능성이 사건 사실 안에 있는데도, 그 가능성을 펼칠 사람이 시스템 안에 없는 자리.
제가 사선으로 받으면 이거저거 써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가능성을 가설로 정리해서 글 한 편에 적어 두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6. 마무리
다시 처음의 위화감으로 돌아갑니다.
빼박 증거 앞에서의 무죄 주장. 그 심리가 어디서 오는가. 답은 두 자리에 있습니다. 한 자리는 의뢰인의 25년 자기 부정. 다른 자리는 변호의 사각지대.
DNA보다 무거운 건 본인의 심리고, 그 심리를 깰 시스템이 없는 자리입니다. 1심 무기. 항소심도 같은 트랙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 글이 어쩌다 항소심 변호인에게 닿아서 공범 분담 카드가 펼쳐지고, 결과가 면소로 뒤집힌다면, 그건 그것대로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무리수일지도 모르겠지만, 또 한 가지 가설을 적어 둡니다. 공범을 지키려고 통째로 부인하는 거라면. 25년 전 함께 들어간 한 명을 위해 무기징역을 감수하는 거라면. 형사변호사 시각으로도 그건 좀 영화 같지만, 사람의 심리는 가끔 영화보다 이상한 자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