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 2026년 6월 28일 · 변호사 김영빈
촬영은 인정했습니다만...?
전부 인정한 카메라등이용촬영 사건. 변호인이 다툰 것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 지경에 이르렀는가'였습니다. 실형이 보이던 자리에서 일부 무죄와 집행유예를 이끌어낸 양형 변론의 기록.
형사 변호를 하다 보면, 다툴 수 없는 사건을 만납니다. 피고인이 이미 전부 인정했고, 증거도 다 나와 있습니다. 이런 사건에서 변호인이 할 일이 남아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아 있습니다. 인정할 것을 인정한 자리에서, 변호인이 다투는 것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 지경에 이르렀는가’입니다.
제가 맡았던 한 사건이 그랬습니다. 협박 및 카메라등이용촬영. 이 사건을 같이 검토한 동료 변호사들 대부분이 실형을 예상하던 사건이, 1심에서 집행유예로 끝났습니다. 오늘은 그 사이에 변호인이 무엇을 했는지를 적습니다.
다툴 수 있는 것
피고인은 두 가지로 기소됐습니다. 하나는 카메라등이용촬영, 다른 하나는 협박이었습니다. 피고인은 사실관계를 전부 인정했습니다. 찍은 건 찍은 것이고, 올린 글은 올린 글이었습니다.
협박 부분은 법리로 다퉜습니다. 사건이 특정될 수 있어 자세히 적지는 않겠습니다만,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해악을 고지한 그 ‘대상이 된 장소’가 현실에 특정되지 않는,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한 협박이었다는 점입니다. 불특정한 공간을 향한 위협을 처벌할 조문이 마땅치 않던 시절이었고, 그 틈을 정확히 짚어 협박 혐의는 일부 무죄가 났습니다. 소위 ‘공중협박죄’는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이후에 신설된 범죄여서, 당시에는 적용이 없었지요.
카촬은 조금 달랐습니다. 다툴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명백한 증거 앞에서 끝까지 부인하는 피고인은, 재판부에 ‘반성 없는 사람’으로 남습니다. 인정할 것을 깨끗이 인정하는 것, 그 자체가 양형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 사건에서의 양형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반성문을 잘 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관계’라는 말의 허점
가장 먼저, 검찰이 그린 ‘사실관계’를 되짚었습니다. ‘사실관계’라는 말 자체가 실은 ‘사실’이 아닙니다. 흩어진 점들을 검찰이 자기 방식으로 이어 붙여 그린 한 장의 그림 — 그래서 사실의 ‘관계’이지요. 같은 점들을, 저는 다르게 이었습니다.
기록만 놓고 보면, 피고인은 성관계 장면을 반복해서 촬영한 사람입니다. 그 그림 안에서 그는 위험한 상습범입니다. 그런데 피의자신문조서와 양형조사 자료를 파고들면, 다른 그림이 보였습니다.
그는 평생 정상적인 연애 관계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한없이 위축돼 있었고, 성을 접한 통로 자체가 정상적인 관계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흔히 떠올리는, 낯선 사람을 몰래 훔쳐 찍는 그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영상에 담은 것은 자신이 직접 대면한 상대였고, 다만 그 관계조차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그 장면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영상은 누구에게도 보내지지 않고, 팔리지도 않은 채, 오직 그의 휴대전화 안에만 있었습니다.
이것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동의 없이 촬영한 것은 분명한 범죄입니다. 다만 양형은 ‘무엇을 했는가’만 묻지 않습니다. ‘왜 그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함께 묻습니다.
저는 이 사건의 촬영이 타인을 향한 위험한 욕망이 아니라, 한 번도 건강한 관계를 배우지 못한 사람의 안으로 곪은 불안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제 말이 아니라 기록으로 보여주려 했습니다.
양형조사
그 다음은, 양형조사를 직접 청하는 일이었습니다.
보통 양형 변론은 반성문과 탄원서로 채웁니다. 그러나 변호인이 쓰는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재판부에게 의례적인 말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판부에 판결 전 양형조사를 요청했습니다. 단순히 사선변호인의 마지막 발악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최소한 저는 양형조사를 그런 식으로 쓰지는 않습니다.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였고, 보호관찰소 조사관이 피고인의 성장 과정과 생활, 재범 위험성을 직접 조사한 회보가 도착했습니다.
그 객관적인 제3자의 평가가 ‘개전의 정이 충분하고 재범 위험성이 낮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호인의 주장이 아니라 조사관의 결론으로, 그 말이 기록에 남았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무게가 다릅니다.
물론 위험한 수입니다. 조사관이 거꾸로 ‘검찰의 평가가 맞다’는 쪽으로 결론을 낼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함부로 둘 수 있는 수가 아니지요. 다만 피고인을 여러 차례 접견하며 그 사람의 바닥까지 들여다본 변호인이라면, 진지하게 꺼내볼 만한 패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인지, 사건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마지막은, 그가 사건 바깥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가족만이 아니라 친구와 오래된 지인들까지 탄원서를 써주었습니다. 성범죄 사건에서 가족 바깥의 사람들이 선처를 탄원하는 것은 생각보다 드문 일입니다. 그들이 그를 위해 펜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사건 바깥에서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추상적인 ‘반성합니다’를 구체적인 유대의 증거로 바꾸는 일, 그게 변호인의 몫이었습니다.
선처를 바란다는 말의 무게
1심은 일부 무죄와 함께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촬영한 행위가 가벼워서가 아닙니다. 처벌은 마땅했고, 재판부도 그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다만 이 사람을 지금 가두는 것과 다시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 중에 무엇이 옳은지를, 재판부가 끝까지 들여다봐 준 결과였습니다.
변호인이 한 일은 ‘봐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봐달라’고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까지 됐는지를, 그리고 그가 정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말입니다. 양형 변론은 결국, 한 사람을 처벌의 한 줄로 줄여버리지 않으려는 싸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