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기 · 2026년 8월 30일 · 변호사 김영빈
개업기 ⑫ 실수와 중력
개업하고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참아서가 아니라, 화날 일이 없게 지었기 때문입니다.
개업하고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참아서가 아니라, 화날 일이 없게 지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커뮤니티에서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신입이 발주를 실수로 열 배 넣었는데, 부장의 첫 질문이 “누가 그랬어”가 아니라 “실수를 알고 나서 보고까지 몇 분 걸렸지?”였다고 합니다. “5분입니다.” “최고다.” 5분이면 발주처에 전화가 닿고, 전화가 닿으면 정정이 되고, 그래서 실제 피해는 없었습니다. 혼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다음부터 실수를 숨기니까, 아예 화를 내지 않는 시스템을 만든 부장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부장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저 부장이 화를 참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을 화가 애초에 없었을 겁니다. 그 차이가 이 글에서 하려는 이야기의 전부이고, 남의 사무실 이야기 같지 않아서 몇 자 적습니다.
탓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시카노코노코노코코시탄탄’이라는 밈이 있습니다. 요즘은 ‘지가모테노코노코탓탓탓’ -_- 같은 변형으로 더 자주 보이는데, 조직에서 사고가 터진 날의 풍경에 이만큼 맞는 리듬이 없습니다. 못했네, 누구 탓이네, 탓탓탓. 그렇게 손가락이 오가는 동안 사고는 어디 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탓이 실제로 하는 일을 뜯어보면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책임을 옮기는 것입니다. 내 몫이 될 뻔한 책임을 남의 자리로 밀어 두는 것인데, 책임이 누구 앞에 놓이든 사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감정을 쏟는 것입니다. 화를 내면 뭔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지만, 십 분 뒤에 사고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화도 그대로 다시 차오릅니다. 쏟아냈는데 줄지 않았다면 그것은 해소가 아닙니다. 결국 탓은 책임을 밀어내는 일과 감정을 헛도는 일을 할 뿐이고, 둘 다 결과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는 직장생활이 이래저래 20년쯤 되는데, 기억을 뒤져 봐도 후임을 탓해 본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한 쪽의 기억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_- 적어도 제 쪽 기억에는 없습니다. 제가 무던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탓의 종착지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탓을 하려고 성실하게 따라가 보면, 종착지가 언제나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그 사람에게 맡긴 것도 저고, 그 방식으로 하라고 정한 것도 저고,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힌 것도 저입니다. 중간에 누가 몇 명 있든 끝까지 가면 대표 하나가 남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구조가 그렇습니다. 조직에서 벌어진 일의 최종 책임이 대표에게 있다는 것은 단일하고 유일한 진실이라, 탓 공방은 시작하기 전에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게임입니다.
그래서 후임의 실수는 저에게 감정의 문제였던 적이 없습니다. 아랫사람이 실수하면 그것을 수습하는 것이 윗사람의 일입니다. 관리라는 일의 내용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기에 대고 화를 낸다는 것은, 정작 그 몫을 져야 할 사람이 자기 일을 아래로 떠넘기면서 감정까지 얹는 것입니다. 일은 하지 않고 열만 내는 셈입니다. 그래서 일하다 화내는 사람을 보면 저는 그 사람의 성격보다 먼저 ‘지금 저 사람, 일 안 하고 있네’라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이유로 누가 저를 탓하는 것도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맞는 말을 듣고 서 있는 시간에 전화 한 통을 더 걸 수 있습니다. 탓은 맞는 말일 때조차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전화 한 통은 무언가를 바꿉니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
삼성물산에 다니던 시절입니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에 사무실에 나갔더니 열 시 회의의 자료가 없었습니다. 회의실 세팅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지시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고, 신입은 그것을 자기 일로 알아듣지 못한 채 주말이 지나간 것입니다. 따지자면 절반 이상이 제 몫인 사고였습니다.
그 시점에 의미 있는 질문은 하나뿐입니다. 아홉 시부터 열 시까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료를 출력하고, 비어 있는 다른 회의실을 잡고, 좌석 수대로 자료를 깔았습니다. 열 시에 회의는 평소처럼 시작됐고, 자료에서 신입 티는 나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신입이 사과를 시작하려기에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럴 시간에 이거 하자고. 사과할 시간이 좀 아까워.”
원인 규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시가 어디서 샜는지 짚는 것은 그날 오후에 해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아홉 시의 일이 아닙니다. 아홉 시의 일은 수습이고, 규명은 수습이 끝난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규명도 수습도 다 놓칩니다.
10분 뒤에 같이 가자
로펌에 있을 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수를 맡고 있던 후임이, 다른 사건에서 다른 사수에게 지적을 받고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찾아왔습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봐 달라고 했습니다. 들여다보니 잘못이라기보다는 어긋남이었습니다. 그 후임은 공대 출신이었고, 그래서 저는 법조 선배가 아니라 공대 선배로 말해 주었습니다.
“너는 skeleton으로 초기 설계부터 공유하는 데 익숙할 텐데, 이 동네는 뭐든 일단 완성본으로 소통해. 아마 그 부분이 걸렸을 거야. 그리고 눈에 보이는 데 logical bridge가 없으면 여기 사람들은 그냥 exception으로 처리하거든. try{} 코드마냥 일단 삽입해 두고 수정하자. 10분 뒤에 나랑 같이 결재 맡으러 가자.”
그 후임에게 필요했던 것은 질책이 아니었고, 사실 위로도 아니었습니다. 번역이었습니다. 무엇이 어긋났는지를 자기 모국어로 들으면 사람은 주눅에서 곧장 작업으로 돌아옵니다. 끙끙 앓던 고민이 실제로는 10분짜리 수정이었다는 것이 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잘 풀렸으니 된 것이겠지요.
공정하게 적자면, 그 수습의 자리에서 제가 부드러운 사람이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10분이나 지났는데 얼만큼 됐어?”라며 사람을 갈아대는 -_- 선배였다는 모 후배의 증언이 있고, 저는 그 증언을 딱히 반박하지 못합니다. 화는 안 냈지만 몰아붙이긴 했다는 뜻입니다. 탓이 없는 것과 느슨한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에러가 하나도 없으면, 오히려 싸-합니다
저는 지금도 개발을 합니다. 사무실에서 쓰는 시스템 상당 부분을 직접 짰는데, 천 줄쯤 되는 코드를 새로 짜서 처음 돌렸을 때 에러가 하나도 없으면 기쁘지 않고 오히려 싸-합니다. 그 코드가 완벽할 확률보다 문제가 아직 눈에 안 띄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입니다. 완벽해서 조용한 것과 안 드러나서 조용한 것은 겉모습이 같습니다.
조직도 똑같이 읽습니다. 실수 보고가 없는 조직은 실수가 없는 조직이 아니라 보고가 없는 조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 어긋남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실수를 이상값이 아니라 정상값으로 놓습니다.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실수’라는 단어부터가 조금 이상한 이름입니다. 실수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없었어야 하는 일’이 되고, 없었어야 하는 일에는 범인이 필요해집니다. 단어 하나가 범인 찾기를 시작시키는 것입니다. 제 눈에 그것은 그냥 일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생기는 일이고, 생긴 일을 다루는 것까지가 일입니다.
물건을 놓치면 물건은 떨어집니다. 그때 중력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줍고, 깨졌으면 치우고, 다음부터는 테이블 안쪽에 놓습니다. 실수가 저에게는 정확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중력처럼, 탓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있는 것. 그러면 남는 일은 수습과 설계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인을 지으면서 이 생각을 구조로 박아 두었습니다.
일을 나눌 때는 제가 수습할 수 있는 일만 나눕니다. 사고가 나도 제 손이 닿는 범위라는 뜻입니다. 그 범위 안에서 사고는 예상한 일이 예상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라 놀라움이 없고, 놀라움이 없으면 화도 없습니다. 화라는 감정은 예상과 실제의 편차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라면 수습 가능한 범위도 같이 자랍니다. 그 범위를 조금씩 넓혀 주는 것이 제가 아는 가장 빠른, 사람 키우는 방법입니다.
실수는 처음부터 계산에 들어 있습니다. 실수 없이 돌아가는 사무실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조직은 없고, 있어 보인다면 보고가 죽어 있을 뿐입니다. 목표는 실수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실수가 나왔을 때 그것이 5분 안에 말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책임은 처음부터 제 것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탓의 종착지가 어차피 저라는 것을 알고 시작했으니, 중간에서 멈춰 서서 누구를 지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두면 이 사무실에서는 “죄송합니다”가 설 자리부터 좁아집니다. 실수를 말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그래서 이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가 됩니다. 사과부터 받는 조직에서는 실수가 관계의 문제가 되고, 관계의 문제가 된 실수는 다음부터 숨겨집니다. 수습부터 받는 조직에서는 실수가 일의 문제로 남고, 일의 문제는 빨리 말할수록 작아집니다. 그 부장의 5분도 결국 같은 이유였을 겁니다. 혼이 안 나서 빨리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조직에서 실수는 애초에 혼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개업하고 지금까지, 사무실에서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렇게 쓰면 인격 자랑 같아서 곤란한데, 정말로 자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돌이켜 봐도 화가 났어야 할 지점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수습 가능한 일을 나누고, 실수를 정상값으로 놓고, 책임을 처음부터 제 자리에 두면, 화날 지점이 설계에서 빠집니다. 참을성이 좋은 사무실이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사무실입니다. 앞으로 사람이 늘어도 이 설계는 그대로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