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기 · 2026년 6월 11일 · 변호사 김영빈

개업기 ⑩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아홉 편의 기록이 가리키고 있던 한 사람 — 사무실은 의뢰인을 위한 일을 하는 곳입니다.

— 1부를 매듭지으며

아홉 편의 기록이 가리키고 있던 한 사람

상담실 문이 열립니다.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어제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거나, 내용증명 한 장에 잠을 설쳤거나 어느 쪽이든 인생에서 가장 불안한 계절을 지나는 중인 분입니다. 그분이 문을 열고 자리에 앉기까지 몇 걸음. 이 사무실의 전부는 사실 그 몇 걸음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의뢰인의 걸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매듭은 여기서 시작해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절반의 말들이었습니다

아홉 편 내내 저는 비웠다는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기록방을 지웠다, 종이를 줄였다, 광고비를 0으로 만들었다, 쌓지 않는다, 만들었다가도 버린다. 매듭을 지으려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니, 이 말들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부 무엇이 없는지를 말하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없음은 자랑이 아닙니다. 빈 사무실 자체에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비움이 의미를 가지려면 무엇을 위한 비움인지가 있어야 하는데, 아홉 편의 문장들은 그 절반을 자주 생략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글에서는 그 절반을 채워야겠습니다.

아홉 편의 진짜 주어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홉 편을 주어만 바꿔서 다시 써 보는 겁니다.

  • ① 가장 볕이 좋은 방은, 의뢰인이 앉는 방입니다.
  • ② AI가 기록을 통째로 읽는 건, 의뢰인의 사건에서 한 줄도 흘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 ③ 쓰는 손과 부수는 손을 나눈 건, 의뢰인이 받아 들 서면에서 약한 고리를 빼기 위해서입니다.
  • ④ 곁의 한 사람은 의뢰인의 전화를 받고, 의뢰인의 서류를 들고 법원으로 뜁니다.
  • ⑤ 예산이 상담실로 몰린 건, 의뢰인과 마주 앉는 한 시간이 이 사무실의 중심이라서입니다.
  • ⑥ 5분의 전화가 다음 날 보고서가 되는 건, 의뢰인이 백지 앞에 앉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⑦ 서면은 의뢰인의 의사로 자랍니다. 길은 변호사가 펴 보이지만, 고르는 분은 의뢰인입니다.
  • ⑧ 네 겹의 안전망이 지키는 건 제 일정표가 아니라, 의뢰인의 인생에 박힌 날짜들입니다.
  • ⑨ 버린 것들의 공통점은 하나였습니다. 전부 의뢰인이 아니라 저를 위해 있던 것들입니다.

이렇게 다시 쓰고 보니 분명해집니다. 주인공은 의뢰인이지 사무실이 주어인 글은, 사실 한 편도 없었습니다.

사무실은 의뢰인을 위한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열 편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사무실은, 의뢰인을 위한 일을 하는 곳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맥이 빠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개업을 준비하며 돌아본 시장에서, 이 당연한 문장을 설계 기준으로 진지하게 쓰는 사무실은 의외로 드물었습니다. 평수와 서고와 중후한 가구 — 그 무게의 절반 이상은 의뢰인이 아니라 변호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안 읽는 책의 무게, 불안의 보험, “이만큼 갖췄다”는 증명. 당연한 문장이 기준의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에 무게가 들어앉습니다.

이 기준 하나를 진지하게 믿으면 개업의 질문 자체가 바뀝니다. “개업하려면 얼마나 갖춰야 하나”가 아니라 “의뢰인을 위한 일에 무엇이 필요한가”가 됩니다. 앞의 질문에는 끝이 없습니다. 갖춤에는 천장이 없으니까요. 뒤의 질문에는 답이 있습니다. ⑤의 산수가 생각보다 가벼웠던 진짜 이유도, ⑨의 폐기장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준이 있으면, 더하기를 멈출 자리와 버릴 자리가 보입니다.

그 일을 누가 하는가 — AiN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의뢰인을 위한 일을, 그러면 누가 어떻게 하는가. 이 시리즈의 AI 이야기는 전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AI에게는 사고와 검증의 자리를 줬습니다. 빠르게 펼치고, 끝까지 부수는 자리.

사람에게는 손발과 만남의 자리를 줬습니다. 법정에 같이 서고, 우체국으로 뛰고, 의뢰인과 마주 앉는 자리. 돈에게는 상담실이라는 자리를 줬습니다.

변호사인 저에게는 마지막 법률 판단과 책임이라는 자리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길로 갈지 정하는 자리는 의뢰인께 그대로 두었습니다. 변호사는 길을 펴 보이는 사람이지, 대신 골라 주는 사람이 아니니까요(⑦).

사무소 이름이 AiN인 이유

사무소 이름이 AiN인 이유를 이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AI와 사람(人)이 각자의 자리에서, 한 사람을 위한 일을 하는 사무실. 어느 쪽도 상대를 흉내 내지 않게 하는 것 — 그게 이 사무실 설계의 전부였습니다.

AI가 변호사를 대체하느냐는 질문은 요즘 어디에나 있습니다. 석 달을 이 구조 안에서 살아 본 제 답은 짧습니다. 대체가 아니라 재배치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변호사가 아니라, 의뢰인 아닌 것들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사무실의 모양일 겁니다.

완성이 아니라 신진대사입니다

⑨에서 적었듯, 지금 돌아가는 구조들도 완성품이 아닙니다. 몇 달 뒤면 무언가는 버려지고 무언가가 새로 지어져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정체를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이건 성공기가 아닙니다. 석 달짜리 관찰 기록입니다. 이 구조가 3년 뒤에도 옳을지, 사건이 지금의 몇 배가 되어도 버틸지, 저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틀린 것이 발견되는 날 이 사무실은 그걸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가리는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의뢰인을 위한 일에 보탬이 되는가. 도구는 전부 갈아 끼워도 이 기준은 갈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무실 자체도 곧 또 변합니다. 사람이 늘 수도 있고, 공간이 늘 수도 있습니다. 그건 “혼자 시작하는 사무실”이 아니라 “자라는 사무실”의 이야기라서, 매듭 뒤의 다음 장으로 미뤄 두겠습니다. 자라는 동안에도 가운데는 바뀌지 않습니다.

시작하실 분께

①에서 저는 따라 지어 개업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그러라고 이 글을 쓴다고 적었습니다. 아홉 편을 지나온 지금도 그 마음 그대로입니다.

개업을 막아서던 공포를 셋으로 기억합니다. 돈의 공포(⑤), 기일의 공포(⑧), 혼자라는 공포(④). 셋 다 정당했습니다. 그리고 겪어 보니, 셋 다 용기로 이기는 게 아니었습니다. 산수는 풀어 보면 생각보다 가벼웠고, 기일은 시스템이 받아 줬고, 혼자는 애초에 혼자가 아니게 지으면 됐습니다. 공포는 용기가 아니라 구조가 이깁니다.

다만 도구도 평수도 순서도 결국 부차적입니다. 먼저 자신이 꿈꾸는 사무실의 그림을 그리시고, 그 그림의 한가운데에 누구를 앉힐지부터 정하십시오. 저는 의뢰인을 앉혔습니다. 그래서 상담실에 돈이 가고, 기록방이 사라지고, 제 방이 창문 없는 방인 겁니다. 가운데가 정해지면 무엇을 비우고 무엇에 아낌없을지는 거의 자동으로 정해집니다. 제 그림과 다른 그림이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게 본인의 사무실이니까요.

준비가 끝나서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림이 명확한 사람이 시작할 뿐입니다. 이 열 편이 그 그림의 밑재료가 됐다면, 시리즈는 제 몫을 한 겁니다.

1부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무실이 자라면 다시 적겠습니다 — 그때도 주인공은 같을 겁니다.

사건의 다음 결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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