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기 · 2026년 6월 11일 · 변호사 김영빈

개업기 ⑨ 버린 것들

석 달 동안 만들고, 부수고, 다시 지은 것들 — 버린 시스템들의 부검 기록.

석 달 동안 만들고, 부수고, 다시 지은 기록

여기까지 이 시리즈는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것들을 보여 드렸습니다. 비운 공간, 깔아 둔 AI, 곁의 한 사람, 상담실로 모인 돈, 전화 한 통이 보고서가 되는 구조, 의뢰인과 왕복하며 자라는 서면, 겹으로 지키는 기일.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 뒤편에는 폐기장이 있습니다. 만들었다가 버린 것들이 거기 쌓여 있습니다. ⑧의 로탑처럼 처음부터 들이지 않은 게 아니라, 한때 실제로 돌아갔던 것들입니다.

따라 지어 개업하고 싶은 분께는 어쩌면 이쪽이 더 쓸모 있을 겁니다. 성공한 구조는 결과만 보이지만, 버린 구조에는 이유가 보이니까요. 먼저 목록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석 달치 폐기장에서 추려 본 명단입니다.

  • 상담을 실시간으로 TV에 중계하던 연출 장치
  • 브라우저 다섯 창을 병렬로 부리던 자동화
  • AI들끼리 업무를 주고받던 사내 우편함
  • 문서를 만들어 내보내던 예전 트랙
  • 음성 녹음을 받아 적던 로컬 모델
  • 본격 코딩 도구 풀세트
  • AI에게 쌓아 주던 작업 규칙 한 무더기

이 중 세 건을 먼저 부검하고, 마지막 하나는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멋있어 보여서 만든 것이 먼저 죽습니다

첫 번째는 연출 장치입니다. 구상은 이랬습니다. 의뢰인이 말씀하시는 동안, 상담실 TV에 그 말이 실시간으로 사건의 구조로 바뀌어 가는 모습이 흐른다. 쟁점이 잡히고, 확인할 사실이 줄을 서고, 말이 분석이 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걸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만드는 데 꽤 공을 들였습니다. 화면 전용 폴더를 파고, 상담 흐름을 따라 화면이 갱신되는 장치를 붙이고, 글자 크기와 넘어가는 속도를 다듬고, 빈 상담실에서 혼자 리허설도 여러 번 했습니다. 매끄럽게 돌아갈 때는 정말이지 근사했습니다. 그래서 실전에 올렸습니다. 실전에서도 여러 차례 매끄럽게 굴러갔지요.

한 번,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의뢰인을 모셔 두고 화면을 띄우는데, 떠야 할 것이 뜨지 않았습니다. “아… 이게 안 뜨네요.” 그 말을 뱉던 순간의 어색함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잘 보이려고 만든 장치가, 가장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장면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물론 내용물은 무사했습니다. 보고서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걸 그 자리에서 출력해서 들고 들어와야 했습니다. 종이를 없애겠다고 책상까지 비운 사람이 말입니다(①). 화면을 자랑하려다 종이를 내밀게 된 그 몇 걸음이, 지금 생각해도 깁니다.

그날 정확히 배웠습니다. 연출의 성공과 실패는 대칭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돌면 “오, 신기하네요” 정도의 가산점인데, 한 번 삐끗하면 신뢰가 본전 아래로 떨어집니다. 인생에서 가장 불안한 시기에 상담실에 앉으신 분 앞에서 걸 도박이 아니었던 겁니다. 성공률을 95% 이상 담보하지 못하는 연출은 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그래서 접었습니다. 며칠을 들인 장치를 폴더째 봉인하면서요.

그날 상담을 구한 것은 화면이 아니라 준비되어 있던 보고서였습니다. 여기서 기준이 하나 박혔습니다. 연출은 실력 위에 얹는 것이지, 실력 대신 세우는 게 아닙니다. 보여 주기 위해 만든 것일수록 빨리 의심해 봐야 합니다.

공들인 것일수록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두 번째가 제일 아픕니다. 자료 조사처럼 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일이 있어서, 사람 대신 화면을 클릭해 주는 자동화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창 하나였습니다. 잘 도니까 욕심이 났습니다. 다섯 창을 병렬로 띄워 다섯 배 빠르게 — 창마다 1호기부터 5호기까지 이름을 붙이고, 한 줄 명령으로 출격시키는 장치까지 만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즐거웠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한 호기가 죽으면 서로 물고 있던 잠금이 꼬여서 다섯이 같이 멈췄습니다. 같은 명령을 두 번 돌리면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제 고친 곳은 멀쩡한데 멀쩡하던 곳이 새로 터졌습니다. 고장 원인을 찾는 시간이 고장으로 잃은 시간보다 길어졌고, 에러 화면 캡처만 폴더 하나를 채웠습니다. 새벽에, 다섯 창이 제각각 다른 화면에서 멈춰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던 밤도 있습니다. 아침에 자리에 앉으면 일 생각보다 “오늘은 몇 호기가 살아 있나”부터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알았습니다. 저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장치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버리는 결정은 한 달 넘게 늦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들인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여기까지 만들었는데, 한 군데만 더 고치면 될 것 같은데. 그 “한 군데만 더”를 몇 주째 반복하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어느 날 통째로 폐기 폴더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백지에서 다시 봤더니 — 애초에 화면을 조종할 필요가 없는, 훨씬 단순하고 곧은 길이 있었습니다. 새 구조의 첫 판이 서는 데는 하루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더 단순했고, 더 안정적이었고, 한 달짜리보다 나았습니다. 한 달을 고치던 사람으로서 좀 허탈했습니다.

그때 박힌 문장이 이겁니다. 아까워서 유지하는 시스템이 제일 비싼 시스템입니다. 결함이 부품에 있으면 고치면 되지만, 결함이 구조에 있으면 고치는 시간이 새로 짓는 시간보다 깁니다. 이건 서면도 마찬가지라서, 저는 뼈대가 잘못된 서면은 고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씁니다.

잘게 나눌수록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③에서 AI의 역할을 나눠 부린다고 적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 원리에 취해서 벌인 일입니다. 역할을 훨씬 잘게 쪼개고, AI들끼리 업무를 주고받는 사내 우편함까지 만들었습니다. 이쪽이 조사해서 우편함에 넣으면, 저쪽이 꺼내 검토해서 다음 우편함에 넣는 구조. 그럴듯한 조직도였습니다. 사무실에 가상의 부서들이 생긴 겁니다.

실제로 돌려 보니, 나눈 만큼 경계가 생기고 경계마다 관리할 일이 생겼습니다. 보고가 보고를 낳았습니다. 우편함이 쌓이면 비워 줘야 했고, 누가 어디까지 했는지 제가 표를 만들어 따라다녔습니다. 일이 빨라진 게 아니라 전달이 늘었습니다. 사람은 저 하나인데 결재 라인부터 발명해 낸 셈입니다.

그제야 분리의 목적이 다시 보였습니다. 쓰는 손과 부수는 손을 나눈 건 검증 때문이지, 분업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목적이 흐려진 분리는 조직이든 시스템이든 비용입니다. 그래서 우편함째 걷어냈습니다.

옳은 규칙도 쌓이면 짐이 됩니다

명단의 마지막 하나는 도구가 아니라서 따로 적습니다. 가장 최근에 덜어낸 것은, AI에게 쌓아 주던 작업 규칙들입니다.

AI와 석 달을 일하면 교정할 일이 계속 생깁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일이 어긋날 때마다 규칙을 하나씩 적어 남겼습니다. 인용은 원문과 한 글자까지 대조할 것,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쓰지 말 것, 이런 식으로요. 한 건 한 건은 전부 옳았습니다. 전부 실제 사고에서 나온 것들이니까요.

그런데 그 옳은 규칙이 백 개쯤 쌓이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AI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쓰기 전에 걸릴 규칙부터 세고, 표현이 갈수록 방어적으로 좁아지고, 어느 날은 제 말버릇까지 통계를 내서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생각하라고 들인 도구가 검열관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겁니다. 규칙 하나하나는 옳은데, 쌓인 전체가 생각을 대신하기 시작한 거지요.

그래서 이것도 손질했습니다. 남길 것은 몇 개의 원리로 올리고, 자잘한 단속은 걷어냈습니다. 지금은 규칙이 늘어나는 속도 자체를 의심하는 것까지가 규칙입니다. 사람 조직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사고가 날 때마다 매뉴얼이 한 장씩 두꺼워지는 조직은, 어느 날부터 매뉴얼을 지키는 일을 일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규칙은 지난 실수의 기록이어야지, 다음 생각의 대체물이 되면 안 됩니다.

버리는 것까지가 짓는 일입니다

넷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만들 때는 전부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 멋있어서, 공들여서, 그럴듯해서, 심지어 옳아서. 그리고 버릴 때의 기준도 하나였습니다. 이게 일을 돕고 있는가, 아니면 일이 이걸 돕고 있는가.

이 폐기들이 아깝지 않으냐고 물으신다면 — 아깝습니다. 들인 밤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전부 수업료였습니다. 연출 장치를 버리며 실력과 연출의 순서를 배웠고, 5호기까지 만들었다 버리며 단순한 구조의 값을 배웠고, 우편함을 걷어내며 분리의 목적을 배웠고, 규칙 무더기를 손질하며 기록과 생각의 차이를 배웠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것들의 모양은, 사실 버린 것들이 정해 준 셈입니다.

①에서 적은 “쌓지 않는다”는 말은 책상과 서류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도구도 쌓입니다. 구조도 쌓입니다. 한때 잘 돌던 것이 짐이 되는 날이 오고, 그날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시스템이 가벼운 채로 유지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리즈에서 보여 드린 것들도 완성품이 아닙니다. 몇 달 뒤에는 이 중 무엇인가가 또 폐기장으로 갈 겁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사무실은 한 번 짓고 끝나는 건물이 아니라, 계속 갈아 끼우는 신진대사에 가깝습니다.

사건의 다음 결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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