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2026년 10월 22일 · 변호사 김영빈
반성문 — 왜 피해자가 아니라 판사가 받을까
반성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라 앞으로 또 그럴지를 따져 형을 정하는 판사가 받고, 피해자가 받을 것은 반성이 아니라 사과입니다. 양형기준에서 진지한 반성은 형량 범위 안에서 형을 조금 옮기는 일반양형인자이고 피해자의 처벌불원은 범위 자체를 감경 구간으로 옮기는 특별양형인자라, 반성문 100장보다 피해자가 써 준 처벌불원서 한 장이 무겁습니다. 반성으로 형을 깎는 일은 한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미국 연방 양형기준은 책임을 인정하면 깎는 등급을 최대 3단계로 숫자로 정해 두었습니다.
반성문은 판사에게,
사과는 피해자에게 —
감형을 더 크게 움직이는 것은
피해자의 처벌불원서입니다

형사 법정에서 피고인이 반성문을 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커뮤니티에는 거의 같은 댓글이 달립니다.
반성을 왜 판사한테 하나. 잘못은 피해자한테 해 놓고. 게다가 판사한테 반성문 써서 형 깎는 건 한국에만 있는 미개한 짓이다. 외국은 피해자가 받아서 찢어버린다더라.
“왜 판사가 반성문을 받느냐”는 질문은 좋습니다. 다만 거기 딸려 오는 대답들은 방향이 거의 다 거꾸로 잡혀 있습니다. 반성은 원래 판사가 받는 것이 맞습니다. 피해자가 받아야 할 것은 반성이 아니라 사과입니다. 그리고 형을 더 크게 움직이는 쪽은, 판사에게 가는 반성문이 아니라 피해자가 써 주는 한 장입니다.
받는 사람이 다른 두 낱말
이 이야기는 두 낱말을 한 덩어리로 뭉개는 데서 엇나갑니다.
반성(反省)은 사전에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향하는 곳이 자기 자신입니다. 반성에는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과(謝過)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입니다. 용서는 혼자서 빌 수 없습니다. 빌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 상대가 잘못으로 다친 사람, 곧 피해자입니다.
그러니 “외국은 피해자가 반성문을 받는다”는 말은 낱말부터 틀렸습니다. 피해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사과지 반성이 아닙니다. 반성은 안으로, 사과는 밖으로.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을 정확하게 알면 오해할 일이 없겠지만, 반지성주의가 넘쳐나는 요즘 그게 쉽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왜 말을 어렵게 만드냐」고 따지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단어를 ‘정확하게’ 쓰지 않으면 진짜 멍청이 취급을 받는 곳이 법조계입니다 – 심지어 멍청이 취급이 문제가 아니라 승패가 갈리죠 – 평생 ‘정확한’ 언어를 구사해 본 일이 없는 영역에서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겠지만요.
반성은 앞날의 일이라 판사가 받습니다
받는 사람이 없는 반성이 왜 판사 앞에 종이로 놓일까요. 형벌은 이미 저지른 일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법은 형을 정할 때 범인의 성행과 환경, 범행 후의 정황까지 참작하라고 합니다(형법 제51조). 이 사람이 앞으로 또 그럴 것인가. 형을 정하는 사람은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그 물음은 결국 사람의 속을 들여다봐야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속을 ‘아무것도 없이’ 읽어 내는 장치는 ‘아직’ 없습니다(생각을 찍어 내는 MRI나 CT가 나오는 SF 속 세상이 오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반성이라는 속의 일을, 형을 정하는 사람 앞에 종이로 꺼내 놓습니다. 반성문은 결정을 쥔 사람에게, 그 사람이 보아야 할 것을 보여 주는 서류입니다. 법원 전자소송의 형사 서류 목록에도 「반성문」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고 판사가 종이를 받는 대로 믿어 주지는 않습니다. 양형기준은 「진지한 반성」을 이렇게 정해 두었습니다.
범행을 인정한 구체적 경위, 피해 회복 또는 재범 방지를 위한 자발적 노력 여부 등을 조사, 판단한 결과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하여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종이가 아니라, 종이 바깥에서 한 일을 봅니다. 반성문을 대신 써 준다는 광고가 기사에 오를 정도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형을 더 크게 움직이는 한 장은 피해자가 씁니다
판사에게 낸 반성문 100장보다,
피해자가 직접 써 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한 장이 훨씬 무겁습니다.
양형기준이 둘의 자리를 그렇게 정해 두었습니다.
양형기준에서 「진지한 반성」은 일반양형인자입니다. 정해진 형량 범위 안에서 형을 조금 옮기는 사정입니다. 반면 「처벌불원」,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은 특별양형인자입니다. 형량 범위 자체를 감경 구간으로 옮길 수 있는 사정입니다. 양형기준은 처벌을 원하지 않는 피해자의 의사를 범행 자체의 사정과 같은 무게로 평가할 수 있다고까지 합니다.
폭행이나 명예훼손처럼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죄(반의사불벌죄)는 더 극단적입니다. 1심 판결 선고 전에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히면, 재판은 공소기각으로 끝납니다. 유무죄를 따지기도 전에 처벌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반성은 말로 하는 약속이라 누구나 입에 담을 수 있습니다. 처벌불원서는 다릅니다. 피해자를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손해를 배상해 합의에 이르러야 비로소 한 장이 나옵니다. 돈과 자존심이 실제로 깎여 나간, 꾸며 낼 수 없는 흔적입니다. 반성문은 대신 써 줄 수 있어도, 처벌불원서에 이름을 적을 사람은 피해자뿐입니다. ‘대신 써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반성문이 우습다는 증거가 아니라, 처벌불원서가 왜 더 무거운지를 거꾸로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물론 실제로 법원에 내는 반성문에는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함께 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그 종이는 피해자에게 가지 않습니다. 한국 법원은 이미 피해자에게 가는 것을, 판사에게 가는 반성보다 윗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양형 의견서를 쓸 때 저는 반성을 맨 앞에 둡니다. 모든 양형 사유의 1번이 반성입니다. 양형기준이 정한 처벌불원의 뜻에도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하여 진심으로 뉘우치고」가 들어 있어, 반성 없이 받아 낸 처벌불원은 양형기준이 말하는 처벌불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량 범위 자체를 옮기는 힘은 대개 그 의견서 뒤에 붙는 처벌불원서 한 장에서 나오지만, 그 한 장도 반성 위에 섭니다.
돈만 공탁소에 맡기고(형사공탁) 피해자를 건너뛰는 길도 이제는 좁습니다. 공탁이 들어오면 법원은 선고 전에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형사소송법 제294조의6), 양형기준도 피해자의 의견과 피고인이 공탁금을 도로 찾아갈 수 있는지까지 따진 뒤에야 공탁을 피해 회복으로 봅니다. 피해자의 뜻을 묻지 않고 맡긴 돈이 그대로 감형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한국에만 있다」 — 바깥에도 있고, 숫자로 정한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판사한테 반성문 써서 형 깎는 건 한국에만 있다”는 말은, 바깥을 보면 오히려 반대입니다.
미국 연방 양형기준은 피고인이 자기 책임을 인정하면(acceptance of responsibility) 형량 등급을 2단계 깎고, 요건이 맞고 검사가 신청하면 1단계를 더 깎습니다. 최대 3단계를 숫자로 정해 두었습니다. 선고 직전에 판사가 피고인에게 직접 말할 기회를 주고 형을 가볍게 할 사정을 듣는 절차(allocution)도 연방형사소송규칙에 있습니다. 영국 양형위원회의 지침도 뉘우침(remorse)을 형을 가볍게 하는 사정으로 꼽습니다.
독일 형법 제46조는 범행 후의 태도, 특히 손해를 회복하고 피해자와 화해하려는 노력을 형을 정할 때 따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형을 감경하거나 받을 형이 징역 1년 이하 정도로 가벼우면 아예 면제할 수 있는 근거는 따로 둡니다. 제46a조, 피해자와 화해하거나 손해를 배상했을 때입니다. 독일 법이 형을 깎아 주는 근거로 정해 둔 것도 반성문이 아니라 피해자와의 화해와 배상입니다.
한국에만 있다고 비웃는 바로 그 일을, 그 비웃음이 우러러보는 ‘외국’도 똑같이 하고, 미국은 아예 점수표로 정해 두었습니다. 한국도 「진지한 반성」이 무엇인지 문장으로 정해 둔 나라입니다.
「외국은 피해자가 찢는다」 — 오가는 것은 사과 편지입니다
피해자가 반성문을 받아 찢어 버린다는 장면은, 어느 나라 제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교정당국에는 수형자가 피해자에게 쓴 사과 편지를 맡아 두는 제도가 있습니다. 형이 정해진 뒤 교도소에서 쓰는 편지이고, 피해자가 원할 때만 전해지며, 재판이나 가석방 심사에 영향을 주려는 제도가 아니라고 밝혀 두었습니다. 다른 몇몇 주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의 교정당국도 비슷한 제도를 둡니다. 피해자에게 가는 것은 반성문이 아니라 사과이고, 그 사과를 받을지는 피해자가 정합니다.
서구에서 자주 언급되는 피해자 진술 절차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가해자가 무엇을 건네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법원을 향해 자신이 입은 피해를 직접 말하는 절차입니다. 한국에도 같은 일을 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피해자가 신청하면 법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해자를 증인으로 법정에 불러, 피해의 정도와 처벌에 관한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형사소송법 제294조의2).
이런 이야기 속의 ‘외국’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개 한국을 깎아내리려고 지어 낸 외국입니다.
반성과 사과를 제자리에 두면
반성은 “앞으로 법을 지키겠다”는 앞날을 향한 약속이고, 그래서 형을 정하는 판사가 받습니다. 사과와 배상은 “이미 끼친 해를 갚겠다”는 지난 일의 청산이고, 그래서 피해자가 받습니다. 둘은 받는 사람도, 향하는 시간도 다릅니다.
반성은 판사가,
사과는 피해자가 받습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반성문을 쓰는 피고인을 비웃기는 쉽습니다. 다만 그 종이가 어디로 가고 왜 그리로 가는지를 알고 나면, 그것이 미개한 구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지난 일과 앞날을 형사 절차가 한자리에서 다루는 장면이라는 게 보입니다. 비웃음은 빠르고, 들여다보는 일은 늘 그보다 한 박자 느립니다.